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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 Mar 28. 2020

스트리밍적 인간

소유가 아닌 구독과 스트리밍의 시대에 발 맞추다

멜론을 다운 받고, 스트리밍 서비스에 가입했다. 생애 첫 스트리밍이었다. 그동안 나는 늘 좋아하는 곡을 그때그때 구입, 다운로드 해서 들었다. 덕분에 스마트폰의 메모리는 늘 부족했다. 사랑하는 음악을 삭제할 엄두가 나지 않아 추억들이 깃든 애꿎은 사진들만 삭제했다. 하지만 스트리밍을 시작하곤 MP3 파일을 모두 삭제했다. 마음이 홀가분하다. 스트리밍의 시작은 내게 무척이나 신선한 행보였다.


어렸을 적에는 좋아하는 앨범은 꼭 사서 들었다. 무형예술을 유형예술로 탈바꿈 시킨 것이 바로 앨범이었다. 청각뿐만아니라 시각과 촉각을 자극하는 그 음악의 형태가 좋았다. 더불어 소유욕까지 충족시킬 수 있었다. 컴퓨터에서 MP3로 전환해서 플레이어에 넣는 번거로운 작업을 거쳐야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곁에 앨범을 두는 것 만으로도, 그 음악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이미 스트리밍 서비스는 오래 전부터 성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스트리밍을 불신하고 탐탁치않게 여겨왔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소유’의 욕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고 여겨서였다. 나는 좋아하는 책은 반드시 서재에 소장하고 있어야 직성이 풀렸다. 만지고 느끼고 세월의 변화도 느껴야만 했다. 음악도 그러했다. 음반이 아니면 MP3의 형태라도 좋아하는 음악을 소유해야만 했다.


토마스 만의 장편소설 <<파우스트 박사>>에는 천재 작곡가 아드리안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베토벤 교향곡 3번을 너무나 사랑했던 그는, 늘 전 악장의 악보를 가방에 넣고 다닌다. 베토벤의 메타포를 늘 곁에 두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어서 말이다. 그의 사고 방식과 유사했다. 그가 악보를 소유했던 것처럼, 나는 MP3 파일을 소유해야 했다.


하지만 소유한다는 것은 변화의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진다는 위험이 있다. 꽉 들어찬 책장, 음반 진열장을 소유한 사람은 새로운 것에 대한 수용 능력이 현저하게 낮다. 새로운 것을 제대로 꽂을 자리가 없는 것이다. 가령 극중 아드리안은 자신이 유년시절부터 소유했던 ‘베토벤 교향곡 3번’에 영원히 머물었고, 그 속에서 삶을 마감했다. 소유가 되려 스스로를 고착화해버린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모아온 천 여권의 장서와 수 천개의 MP3 파일은 사실 세상을 향한 담장과 다름 없었다. 애정하는 소유물에 둘러쌓여 그저 그것들의 취해만 있었다. 취해서 내것들이 최고라고만 여겼다. 도취 때문에 싱그럽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지 못했다. 이 시대는 스트리밍과 구독의 시대라는 걸 깨닫고 담장을 허물었다. 내게 스트리밍의 시작은, 새로운 사고방식의 시작이기도 했다.


시대의 색채에 주목하고, 시대의 소리에 귀기울여보려 한다. 구독과 스트리밍 속에서 싱그럽고 새로운 것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여보려 한다. 그리하여 이 시대의 주파수를 읽을 수 있는 인간이 되어보려한다.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나 자신이 아니다. 나 자신은 도구일 뿐이다. 나의 작품들을 이 시대의 것으로 만들어보려는 것이다. 누구나 구독하고, 스트리밍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말이다.






instagram : @leewoo.demian

https://www.instagram.com/leewoo.dem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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