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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 Apr 14. 2020

우리는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못했다

N번방의 기저에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적인 성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무고한 목숨이 위협받는 시국에도 온 국민이 또 다른 사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건 바로 N번방 사건이었다. 조주빈을 비롯한 일당은 여성의 신변을 위협해 성착취를 했고, 그 영상을 팔아 이득을 취했다. 인간의 존엄성이 말살된 극악무도한 사건이었다. 세간을 경악케 한 건 이 사건이 비단 한 일당만의 범행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경찰은 대략 26만명이 이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했다고 밝혔다. 경악을 감추지 못할 일을 여느 중소도시의 인구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관람을 한 셈이었다.


N번방에 대해 전 국민이 분노를 터뜨렸다. 사건에 관여한 사람들에 필적할 만한 20여만 명의 사람들이 청와대 국민청원에 사건 주범의 신상을 공개해달라며 청원에 서명을 했다. 주범은 포토라인 앞에 섰고, 일당들도 검거되었지만 성착취방은 또 다른 온라인 망명지를 찾아 뻗어나가고 있다. 과연 조주빈을 비롯한 이번 사건의 일당들에게 온당한 처벌이 내려진다고 한들 이러한 사건이 재발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애석하게도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번 처벌은 현상을 자르는 것이지, 근원을 자르는 것이 아니기에.


수십 만의 사람들이 협박을 통해 얻어낸 한 여성의 착취 현장을 입장료와 관람비까지 내면서 관람했다. 익명성이라는 가면을 쓴 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어째서 26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죄의식 없이 범죄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할 수 있었을까. 사실 26만 명이 가담한 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한 개인 혹은 소수의 집단이 저지른 범죄와는 규모가 다르다. 이러한 사건은 사건을 넘어 하나의 현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제 의문을 바꾸어야 할 차례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 현상은 그동안 이러한 의식이 시대 속에서 공유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개개인들이 감추어온 이상 성욕이 법과 관습과 도덕의 등불 밑에서 기괴하게 자라난 것이다. 그 이상 성욕은 익명성의 가면을 쓰고 하나의 자아가 되어 날뛰었다. 도덕심도, 가치판단도, 연민도, 그 어떤 감정도 망각한 채 무섭게 자라났다. 하지만 법과 관습과 도덕의 손길이 익명성의 세계에 손을 뻗히자 모두들 가면들을 벗어던졌다. 사건에 연루되었던 사람들이 자살한 사건들이 연일 보도되었다. 그들은 이제야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의식의 문제는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교육의 문제이다. 그러한 생각들이 자라날 수 있는 토대는 사회가 만든 셈이다. 우리 시대는, 사회는 성인식性認識을 어떻게 만들어왔던가? 사실 우리 세대는 성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늘 피상적으로만 접근했다. 그리고 늘상 아는 이야기만 지루하게 할 뿐이었다. 정자와 난자의 만남에 이어 임신과 출산으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으로서만 교육을 받았다. 그 메커니즘에 어떤 감정과 사랑이 기재되는지, 또한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이 시대는 일상의 언어로 성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섹스는 사랑의 또 다른 언어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성에 대해서는 가볍거나 무거운 인식밖에 없었다. 유년시절부터 동성 친구들 사이에서는 성을 짓궂은 호기심으로 그저 환상적으로 바라보았다. 또래와 함께 형성한 성인식은 너무나 가볍고 또 유희적이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너무나 무겁게만 이야기했다. 대중매체는 성을 사건화해서만 전해주었다. 경악해 마지않는 무겁고 진중한 사건으로만 말이다. 망측스럽다며 일상에서는 침묵할 뿐이었다.


시대는 그저 성에 대해 '무거운 비유 담론'만 만들어냈다. 무거움으로 말미암아 성이란 것이 얼마나 무겁고 진중하고, 어둡고 찝찝한 일인지 각인시켜 주었다. 시대의 집단 무의식 속에 일종의 '원죄의식'을 만들어낸 셈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이방의 종교였던 기독교가 이토록 한반도에 호소력이 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원죄의식은 유교적 사고관과 강하게 혼합되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의 원칙은 남녀를 사회적으로 분리해왔다. 남중, 남고, 군대. 여중, 여고, 여대. 서로 다른 성에 대해서는 신비감만이 자라났다.


사회는 남녀가 서로 어울리고 부대끼고 자라나며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것들을 근원적으로 막아놓았다. 그런데 사실 성에 대해 밝고 긍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녀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분위기 속에서 자라온 사람들이다. 남녀의 사회적 장벽을 극복하고 자연스럽게 우정과 사랑을 통해 교류해온 사람들이 성에 대해 일상 언어로 이야기할 줄 안다. 그것이 얼마나 인간에게 필수적이고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지도 안다. 올바른 교류를 통해서 성적 욕망을 올바르게 긍정할 줄 아는 것이다.


반면 동성의 장벽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성性도덕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성적 욕망은 성도덕에 억눌려있다. 억눌린 성적 욕망의 고삐는 이내 풀리고 만다. 사랑의 대상과 나누어야 할 성적 욕망은 번지수를 잘 못 찾게 된다. 그저 성적 대상을 찾게 되는 것이다. 욕망은 성도덕의 잣대가 닿지 않는 음지로 향하게 된다. 사람들은 익명성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어두운 술집과 클럽, 그리고 SNS 메신저로 모여든다. 억눌린 성적 욕망을 그대로 표출한다. 그 무엇도 통제할 수가 없다. 바로 이 음지에서 오늘날의 사태가 자라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회가 정해준 성도덕의 잣대 속에서 살고 있다. 성도덕은 사고 회로를 지배하고 말았다. 사회는 성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무분별하게 도덕적 심판대에 세운다. 법의 심판대가 아니라 도덕적 심판대이다. 극악무도한 성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마땅히 서야 할 도덕적 심판대에 본의 아니게 성생활이 드러난 사람들도 세운다. 리벤지 포르노처럼 자연스러운 성생활이 사회에 드러나게 되면, 우리는 너무도 쉽게 그것을 부도덕의 잣대로 단죄한다. 마치 우리는 성적으로 고결하다는 듯이.


이른바 '섹드립'으로 여겨지는 유머 코드가 시대에 통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섹드립은 대중매체 조차도 필터링하지 않는다. 대중에게 불쾌감을 선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긍정적이다. 모호한 신비감과 무거운 성도덕에 억눌린 성 인식을 유쾌하게 긁어주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성에 대해 가장 일상적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이 '섹드립'인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사회는 공공연하게 성적 상품화를 긍정하고 있다. 한 친구는 남자들이 대부분인 자신의 회사의 회식문화를 이야기해주었다. 회식의 2차는 늘 성적 회포를 풀러 가는 자리라고 했다. 그곳에 참여하지 않는 일원은 남자답지 못하다며, 단합심이 없다며 질타를 받는다고 했다. 사업을 하시는 아버지는 어느 날 경쟁 업체에게 가장 큰 거래처를 뺏겼다. 알고 보니 거래처의 담당자가 경쟁 업체에게 로비와 성 접대를 받았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지만, 이게 세상이 움직이는 논리라고 애석해했다. 이것이 우리 사회 저변에 깔린 성인식의 현주소였다.


프로이트는 한 인간의 자아ego 형성에 중요한 키워드를 '리비도libido'라고 보았다. 프로이트에 한에서 리비도는 '성적 충동'을 일컫는다. 프로이트는 리비도야말로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에너지로, 이것이 한 인간의 자아와 인격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리비도는 늘 '초자아superego'라 불리는 사회-도덕적 규율과 갈등과 규제를 받게 된다. 자아는 성적 욕망이 억눌리게 되면 '노이로제'와 '죄의식'을 유발하게 된다. 리비도가 올바르게 발현되지 못한 자아는 건강하지 못하고 정신 질환에 시달린다.


프로이트가 보는 것처럼 성적 충동은 한 개인에게, 한 개인의 자아 형성에 무척이나 중요한 핵심이다. 그래서 '리벤지 포르노'처럼 피해자에게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개인의 성적 문제도, 당사자를 죽음으로 몰고갈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 성도덕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것이다. 시대는 완고한 성도덕과, 원죄의식, 그리고 왜곡된 성인식을 치유해야만 한다. 그래야 수십만 명이 동조한 제2의, 제3의 N번방이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건강한 언어로, 일상의 언어로 성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이제는 성교육을 다시 시작해야 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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