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의 투쟁

작가는 삶의 양식일까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일까

by 이우

또다시 집필한 단편소설들을 문학상에 띄워 보냈다. 인쇄를 하고 봉투에 넣어서 우편으로 보내는 이 과정, 이제 새로울 것도 없다. 연례행사가 된 지 오래다. 햇수로 어언 십 년 째이다. 이건 마치 답장도 없는 편지를 보내는 것만 같다. 그간 낙선의 고배뿐이었는데 자존심도 없는 것일까. 무슨 미련과 집착 때문일까. 이렇게 매년 미상의 심사위원들에게 소설들을 보내는 건 나의 정체성의 문제인 것 같기도 하다.


이십 대 초반, 나는 독서에 빠지고 문학에 취한 이래로 나의 길은 문학뿐이라 여겼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말했다. 인간은 혈연적 유대관계보다 정신적 유대관계에 더 큰 애착을 느낀다고. 나는 가족보다 친구보다 내가 읽은 작가들에게 더 큰 애착을 갖고 살았다. 어떤 인간관계보다 책을 읽는게 좋았다. 심지어 사랑보다도 더. 그래서 괴테와 니체, 헤세, 카뮈의 무덤을 찾아 순례를 하기도 했다. 마치 조상에게 찾아가는 것처럼.


나의 정신적 유대관계는 대문호들 뿐이었다. 극단적인 시절에는 사랑도 우정도 심지어 가족도 하등 가치 없는 것이라 여겼다. 한 번도 대문호들과 마주한 적은 없었지만, 이미 그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유일한 인생의 친구이자 문학적 동료였다. 머지않아 그들과 같은 반열에 오를 것이라 막연하게 확신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인식이 그간 나의 정신적인 불안을 야기한 원인이 되었다. 여기서 인지적 부조화가 시작되었다. 현실과 이상의 간극이 너무 컸던 것이다.


이미 작품을 쓰고 작가가 된 것 같은데 화려한 등단은 하지 못했다. 삶의 8할은 문학에 투자하는데 이게 작가로 가는 길이지 허망한 시간만 보내는 것인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이윽고 문단의 인정 없이도 소설가가 되어보겠다며 호기롭게 출판을 했다. 내게 용기가 되었던 건 소설가 김영하의 등단 스토리였다. 그는 신춘문예에서 떨어지자 한국문단에서 인정해주지 않는 3류 문화잡지를 통해 작품을 소개하며 등단 아닌 등단을 했다고 했다. 나도 좌절보다는 스스로 길을 개척하고 싶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두 권의 책을 출판했고 곧 또 한 권의 책을 출판하려 하고 있다. 내게 소설가라는 정체성은 스스로 만들어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제 나의 작품들을 사랑해주는 독자분들은 나를 작가라고 불러준다. 종종 책을 잘 읽었다며 장문의 편지도 보내는 분도 계신다. 작품으로서 인정 받을 때면 정말 꿈을 꾸는 것만 같다. 그들 덕분에 정말 작가가 된 것만 같다. 자칭하고 타칭하는 작가이니 엄연하게 따지면 그토록 그리던 꿈을 마주한 셈이다.


그럼에도 나는 연례행사를 멈추지 않고있다. 이 오기는 사실 인정의 문제라는 걸 알고 있다. 사람은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자아성찰 내지 자아실연을 통해서만 온전한 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한 개인의 정체성을 완성해주는 건 주변 사람들의 인정이다. 네가 최고야. 넌 더 잘할 수 있어. 너는 정말 멋진 친구야. 온갖 명상을 하고 고뇌를 하며 자아성찰을 하는 것보다 주변의 따스한 한마디가 더 한 개인의 정체성에 즉효적이다. 분명 나는 이 인정의 결핍이 있었다.


나의 소설가로서의 정체성은 상처가 많았다. "이게 소설이야?", “작가라면서 일은 왜 해?”, “하긴 전업 작가는 아무나 못하지.”, “그래서 그거 하면 월에 얼마 벌어?”, “저희 서점은 등단 작가만 받아요.” 가볍게 웃어넘기는 척해보지만, 작가로서의 정체성은 한없이 작아진다. 내가 무얼 썼고 또 무얼 쓰고 있든. 이제 나는 어지간한 문학 공모전의 일정은 모두 꿰고 있다. 때가 되면 어느새 원고를 준비하고 있다. 또다시 문학상에 우편을 보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인정보다는 상처를 치유하고 싶은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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