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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 Nov 20. 2020

비기독교인으로서 성경 읽기

소설가로서 기독교 세계 탐구하기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성경을 읽었다. 성경을 읽게  계기는 단순히 배경지식을 갖고 싶어서 였다. 성경을 모르니 책을 읽어도 개운치 않았다. 가령 단테의 「신곡」이나 밀턴의 「실락원」, 괴테의 「파우스트」,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기독교적인 배경을 갖고있지 않다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문학뿐만 아니다. 홀로 공부했던 서양철학사나 학부시절 전공으로 택했던 서양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기독교적인 지식이 필요했다. 이른바 ‘문사철 깊이있게 흡수하려면 기독교는 필수불가결한 지식인 것이다. 게다가 기독교는 인류의 절반 이상이 믿기에 우리가 집단 무의식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상징체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읽기 시작했다. 성경을 읽는 사람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참으로 다양했다. 군대에서는 성경을 읽는다는 이유 만으로 예수쟁이, 개독이라고 불렸다. 대학교에서는 기독교인들의 포교 대상이 되었으며, 채플 목사님은 나를 불러 자신의 신앙의 세계로  것을 권유했다. 부모님은 기독교인이  거냐고 물었다.

물론 많은 질문을 받았던  지난 시절, 내가 걸어다니면서까지 열정 넘치는 유난스러운 독서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성경이 신앙이 아닌 독서를 위한 독서라는 것은 설명하기란  어려웠다. 대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고개를 갸우뚱했고, 때로는 신앙은 창피한  아니라는 식으로 다독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의 성경에 대한 관점은 보카치오와 같다. 그는 성경은 신이   아니라 당대의 시인들이  서사시라고 정의했다. 구약은 모세 오경을 비롯한  개의 예언서를 제외하면 저자가 미상이긴 하지만 고린도서,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같은 경우 각각 바울, 마가, 누가, 요한이라는 저자가  하나의 ‘이야기이다. 나는 ‘성경 아니라 그들의 저서를 읽는 셈이다.

무작정 읽었던 성경은 이제 내게 하나의 정서로 자리잡았다. 그래서인지 나의 장편소설 『레지스탕스』에는 기독교에 대한 담론이 장황하게 등장하며, 위클리우에서 연재하는  편의 소설 「에덴으로부터의 추방」과 「아와 비아」에는 극중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기독교적인 상징들과 신부의 설교 장면도 등장한다.

성경을  가까이해서 그런지 신앙에도 관심이 생기곤 한다. 믿으면 정서적으로, 심적으로 굉장한 위안이   같기도 하다. 그래서 가족이 생기면 나의 믿음에는 관계없이 가정의 종교를 기독교로 택하고 싶다. 그렇지만 그때도 믿음이 생길지는  모르겠다. 종교가 믿음의 영역이 되면 탐구의 대상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임종을 앞두고서야 세례를 받았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떠오르는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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