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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 Nov 24. 2020

꿈과 희망의 시간, 카이로스

고대 그리스의 관점에서 '시간'을 바라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간을 두 개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그것이다. 크로노스는 시간의 신이다. 그는 2세대 그리스 신으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제우스를 비롯한 여섯 올림푸스 주신主神들의 아버지이다. 크로노스는 1세대 그리스 신인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대지의 여신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스인들은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 시간이 가장 먼저 생겨났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 시간을 통해 세상을 주관하고 인간을 다스리는 올림푸스 신들이 탄생했다.


고대 그리스 신들은 모두 관념의 신이다. 크로노스Cronos는 시간이라는 관념의 신격화이다. 여기서 신격화를 빼면 관념은 사전적 정의가 된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그리스어로 크로노스는 시간을 의미한다. 크로노스는 구체적인 시간이 아닌 지금 이 순간도 하염없이 흐르고 있는 시간을 뜻한다. 이 크로노스의 의미는 오늘날까지도 널리 쓰이는데, 가령 시간을 시각화하는 시계의 계기판을 크로노그래프Chronograph라고 부른다. 고대 그리스의 신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는 셈이다.


고대 그리스에는 크로노스가 아닌 또 다른 시간에 대한 관념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카이로스Kairos이다. 카이로스는 기회의 신이다. 콕 집을 수 있는 구체적인 시간도 아니고,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도 아니다. 가장 적절한 우리말은 ‘때’이다. 언젠가 올 순간, 우리가 하염없이 고대하는 어느 한 순간을 의미한다. 카이로스는 ‘때’의 의미하는 시간 개념으로 오늘날까지 쓰인다. 크로노스만큼 일상에서 접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종교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기원전 1세기-2세기 즈음에는 오늘날의 영어처럼 그리스어가 식자층의 언어이자 유럽-소아시아 문명권의 공용어였다. 그래서 신약도 고대 그리스어인 헬라어로 쓰였다. 예수의 복음을 유럽에 전하고 훗날 그리스 정교회의 토대를 쌓은 사도 바울도 로마제국의 언어인 라틴어가 아닌 헬라어를 이용했다. 이렇게 고대 그리스어로 쓰인 신약에도 카이로스가 등장한다. 카이로스는 '예수 재림'과 '천국의 도래'를 가리키는 미래의 어느 한 시점을 가리킬 때 쓰인다. 기회의 신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믿음의 영역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영향력은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여전히 우리는 크로노스의 영향력 아래 살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크로노그래프’를 바라보며 시간을 체크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영역 그 자체가 크로노스이다. 그렇다면 카이로스는 어떻게 우리 곁에 있을까. 그것은 기독교에 침투한 카이로스처럼 어떤 맹목적인 희망과 결부되어 있다. 언젠가 목표를 성취할 그날, 꿈을 이룰 그날, 사랑을 쟁취할 그날, 누군가에게 인정받을 그날. 그게 바로 카이로스이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시간이다. 아침에 알람 소리에 깨어 일어나고, 도착 시간에 맞춰 정차란 버스와 지하철에 몸을 맡겨, 정해진 시간까지 학교 혹은 직장에 도착한다. 그리고 점심시간, 퇴근 시간에 맞춰 움직인다. 퇴근 후 저녁 약속도, 좋아하는 티브이 프로그램도, 운동 경기 관람도, 주말 약속도 모두 정확한 시간 아래 진행된다. 손꼽아 기다리는 휴가도, 공휴일도 모두 정확한 시간으로 정해져 있다. 우리는 철저하게 세분화된 크로노스 속을 살아가며 크로노스에 의해 움직인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후대의 신들이 전대의 신들보다 강력하다. 그래서 나는 크로노스보다 더 강력한 게 바로 카이로스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이지 않은 시간들이 저 미래의 어느 순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대학에 합격하는 날, 학위를 취득하는 날, 시험에 합격하는 날, 여행을 떠나는 날, 주택청약에 당첨되는 날, 본가에서 독립하는 날, 집을 소유하는 날, 대출 원금을 모두 상환하는 날, 부자가 되는 날, 고난 없이 행복해지는 날, 누군가의 사랑을 얻게 되는 날. 카이로스는 매혹적으로 우리에게 손짓한다. 그날을 위해 달려가라고.


뿐만 아니다. 인간은 카이로스를 위해 정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지난날 사회주의자들은 인류의 정치적 낙원을 위해, 독일 나치는 아리안족의 부흥을 위해, 일본은 제국주의의 번영을 위해 국가적으로 살인을 정당화하기까지 했다.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선조인 독립운동가들도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서는 적을 서슴없이 죽이기까지 했으며,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놓았다. 물론 대의적인 카이로스가 아니어도 개인의 꿈, 야망, 희망, 사랑, 행복 등과 결부된 카이로스는 인간을 움직이는 원동력 그 자체가 된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이 있다. 작중에서 두 주인공은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고 있다.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언제 어디서, 몇시 몇분에 오는 사실도 모른 채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린다. 어느 날에는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린다. 극이 막을 내리는 순간까지도 그들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고도를 기다린다. 고도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이 있지만, 나는 고도가 바로 인간의 모든 꿈과 희망이 인격화된 카이로스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일주일 후 찾아 올 주말과 언젠가 다가올 꿈과 희망의 날 중 어떤 것이 더 달콤한 것일까. 나는 후자를 택하고 싶다. 오늘도 나는 고요한 방 안에 앉아 두 영역의 시간을 느낀다. 시곗바늘의 째깍째깍 소리를 들으며 멈출 수 없는 시간을 체감한다. 그리고 시곗바늘이 결코 가리킬 수 없는 미래의 어느 한 순간, 카이로스를 꿈꾼다. 아스라이 카이로스의 시침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이 세상에는 크로노그래프처럼 '카이로스'를 알 수 있는 카이로그래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래도 나는 카이로스를 위해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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