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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 Oct 14. 2021

우리는 다른 사전을 갖고 있었다

세상에는 나와 비슷한 언어를 쓰는 사람이 있을까

친했던 친구와 서서히 멀어지게 되었고, 이제는 연락조차 하지 않는다. 크게 싸웠던 것도 아니었다. 아주 평범했던 술자리 이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와 처음 만났던 것은 대학 시절이었다. 캠퍼스 한 편에 위치한 커다란 원형 극장에 홀로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 원형 극장 가운데로 누군가 걸어 나왔다. 그는 건장한 체격의 흑인이었다. 그는 무대 가운데 홀로 서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는 휘트니 휴스턴의 <I'll always love you>였다. 화창한 봄날이었고, 그의 노래는 정말 너무 아름다웠다. 나는 노래가 끝나자 박수를 쳤다. 그가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낯선 곳에서도 자신의 빛깔을 아름답게 발산하는 에너지. 나는 그의 자질에 매료되고 말았다.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 그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술자리로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되었다. 사실 우리는 친구가 되기에는 많은 것이 달랐다. 그는 뉴욕에서 건너와 이곳에서는 영어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나는 문학을 좋아하는 한국인 대학생이었다. 우리는 바로 그 다른 점들이 닮아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깊이 동화되지 못한 채 겉돌고 있었다. 나는 문학에 취해 캠퍼스에 섞이지 못한 채 부유하고 있었다. 이 공통점만으로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한국의 이방인과 한국의 부적응자는 서로의 마음을 너무나 잘 이해했다. 나는 문학적 열정을 그 누구와도 이야기할 수 없음을 한탄했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귀 기울여주지 않던 열망을 혼자 간직해야 하는 게 마치 바람 부는 언덕에 촛불을 들고 있는 기분 같다고 고백했다. 그도 나의 감정이 어떨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게이라고 고백하며, 그동안 동성애자로 수많은 편견과 불합리를 겪어오며 살아왔다고 털어놨다. 나는 그의 삶의 궤적이 어딘가 나와 무척이나 닮아있다고 느꼈다. 함께 같은 곳으로 나아가는 동료가 생긴 것만 같았다.


어느 날 그가 물었다. "한국에서 게이라고 하면 나를 멀리하던데 너는 아무렇지 않아?" 나는 그에게 에우리피데스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본래 인간은 머리도 두 개고, 팔과 다리도 네 개였다고 해. 두 명의 사람이 붙어있었다고 보면 되지. 그런데 제우스는 이들이 너무 오만하다고 생각했고, 마침내 이들을 반으로 갈라버렸어. 오늘날의 '반쪽짜리' 인류가 탄생하게 된 거지. 그는 바로 이때 갈라진 반쪽을 찾는 게 사랑이라고 했어. 그의 말처럼 내가 이성을 사랑하는 것처럼, 너의 동성애도 반쪽을 찾는 다 같은 사랑인 거야." 그는 감동이라며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우리는 정말 자주 만났다. 함께 전실회를 가기도, 커피를 마시기도, 영화를 보기도 했다. 나는 그가 이야기해주는 브루클린의 삶과, 게이의 삶과 사랑, 한국에서의 일상,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휘트니 휴스턴의 예술적 삶에 대해 듣는 게 마치 새로운 책을 읽는 것만 같아 너무 좋았다. 그도 나의 세계 여행 이야기와, 산티아고 순례의 경험, 어긋나기만 했던 사랑, 그리고 문학에 대한 열정들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청해주었다. 우리는 이방인과 부적응자라는 서로의 정체성에 동질감을 느끼며 서로의 다른 점들을 기꺼이 수용했다. 다른 점들이 자신을 긍정하게 해 주는,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메타포인 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좋았던 시간들은 채 반년도 가지 못했다. 어느 날 맥주를 함께 마시던 날의 일이었다. 우리는 종종 단어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사랑에 대하여, 예술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했고 경청했다. 그날은 '운명'이란 단어가 대화 주제였다. "네게 운명이란 뭐야?" 그가 물었다. "음, 지금의 나를 거부하고 완전히 새로운 내가 되는 거." "지금의 너를 거부하는 게 운명이라고?" "응. 나는 그게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해. 지금은 비록 아무것도 아니지만, 부단하게 노력해서 언젠가는 멋진 작품을 집필한 소설가가 되는 거지." 그가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그건 그냥 꿈일 뿐이지. 그건 운명이라고 할 수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물었다. "지금의 자신을 거부하는 건 운명을 거부하는 거야. 그건 거짓된 삶을 사는 거라고."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네게 운명은 뭔데?" 나도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동성애자로 이 편견뿐인 삶을 살아가는 거지. 그리고 힘든 이 세상에서 진짜 사랑을 찾는 거. 그게 내 운명이야." 나는 그의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가 말하는 건 운명일 수 없어. 그건 그저 성적 취향과 사랑일 뿐이지. 한 인간의 운명이란 그보다 더 숭고해야 해.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이룩하고, 자아실현을 하는 게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이고 운명이야." "아니야! 이건 성적 취향과 사랑을 넘어선 운명이야!"


그에게 운명이란 이러한 것이었다. 게이로 살아가는 것, 그로 인한 불합리와 편견에 맞서 싸우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찾는 것. 즉, 주어진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운명이었다. 그러나 내게 운명이란 현실을 거부하고 노력해서 멋진 소설가가 되고, 찬사를 받는 소설을 쓰는 것이었다. 즉,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 운명이었다. 우리에게 운명이란 각자 존재의 본질과도 결부되어 있는 아주 중요한 단어였다. 하지만 각자의 운명이란 것은 서로의 운명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내게 질문했다. "어떻게 지금의 너를 거부할 수가 있지?" 나는 계속해서 반문했다. "어떻게 지금의 너를 극복할 수 없지?"


우리의 우정은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불쾌해서 서로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종종 그와의 만남을 생각해보곤 한다. 우리는 이방인과 부적응자라는 공통점으로 수백 가지의 다른 점들을 관대하게도 받아들였다. 그럼, 네 말이 맞아,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말이다. 하지만 수백 가지의 다른 점들에는 고개를 끄덕여주었지만 단 하나의 다른 점은 결코 수용하지 못했다. 그것은 서로의 깊은 심연, 존재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 아주 중요한 단어였다. 서로의 운명에 대한 정의는 이해는 했지만 그렇게 정의하도록 용납할 수 없었다. 인정할 경우 스스로가 무너질 수도 있는 문제였기에.


인간은 어쩌면 각자의 고유한 사전을 갖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국가에서 표준으로 정한 사전이 있다한들, 우리는 세상의 단어에 대한 뜻을 스스로 정의하며 살아간다. 가장 가까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눠봐도 이는 명확해진다. 사랑부터 우정, 가족, 꿈, 행복, 아니 패션과 자동차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봐도 이는 여실히 드러난다. 서로 각기 다른 사전을 갖고 있다. 티비에서도 격한 논쟁을 벌이는 100분 토론만 봐도 모두 단어의 정의에 대한 논쟁이다. 복지란 무엇인가, 인권이란 무엇인가, 국가 안보란 무엇인가. 모든 문제가 사실 이 사전의 차이로부터 비롯된다. 사소한 다툼부터 법적 문제까지.


알베르 카뮈는 인간사의 모든 비극은 정확한 언어를 쓰지 않아서 비롯된다고 했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각기 다른 사전을 갖고 있기에 비극은 불행하게도 계속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비극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본능이 있는지 매일매일 서로의 사전을 대조하며 살아간다. 겨우 단어 하나로 둘도 없는 소중한 사람이 되고, 고작 단어 하나 때문에 하나뿐인 원수가 된다. 나는 생각한다. 나의 사전은 누구에게 어떤 부분까지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또 나의 사전은 누구를, 나아가 어떤 세계를 수용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놀랍도록 나와 비슷한 사전을 가진 사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본문에 대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만들어봤어요!

https://youtu.be/I9JdW3pn1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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