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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 Oct 24. 2020

갑자기는 안돼요

하루빨리 목적에 도달하고 싶은 젊은 작가의 조급함에 대하여

중학교 시절 나를 열광시켰던 게임은 어둠의 전설이었다. 평소에는 하지 못했고 방학에나 할 수 있는 게임이었다. 시간이 없었던 것도, 컴퓨터가 없었던 것도, 부모님이 못 하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게임이 매월 정액료를 지불해야 할 수 있는 게임이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게임하는 것 까지는 허락해주었지만, 매월 돈까지 내며 게임하는 것은 허락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방학이 되면 사정이 달랐다. 유료이던 게임이 방학 시즌에는 이벤트로 특정 레벨(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19 정도였다)까지 무료로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방학 때면 어둠의 전설을 하는 친구 한 명과 함께 늘 게임을 했다. 이 게임은 캐릭터를 만들고, 직업을 선택해서 처음부터 성장시켜나가는 롤플레잉 게임이다. 캐릭터가 생성되면 맨몸부터 시작한다. 정말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있는 맨몸이다. 처음에는 팬티바람으로 사냥터에 가서 몬스터들을 맨손으로 때려잡으며 레벨을 올려야 한다. 그래도 사냥을 하면 돈도 벌고, 막대기나 칼 같은 자질구레한 아이템들을 얻을 수 있다. 정말 열심히 해서 레벨 10정도 되면 밑단이 찢어진 바지도 입고 초보 사냥터에서 어깨 좀 펴고 다닐 수 있다.


하지만 마을에 가면 기세 등등하던 레벨 10의 마음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휘황찬란한 갑옷이며, 옷이며, 신발이며, 귀걸이에 염색까지 한 유저들이 모여 있다. 그들은 레벨 80~99 정도가 되는 고레벨의 유저들이다. 그들 옆에 가면 빈부격차가 확연하게 느껴졌다. 게임에서는 레벨이 곧 권력이고 재력을 의미했다. 그들은 종종 저레벨 유저들에게 좋은 아이템에나 돈을 주거나 사냥터에 함께 가주곤 했다. 그래서 그들 곁에는 레벨업이나 적선을 바라는 저레벨 유저들이 많았다. 마치 그들은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저레벨들을 몰고 다녔다.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넝마 같은 바지가 아니라 멋진 갑옷을 입고, 맨손이 아니라 멋진 칼을 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만 출입할 수 있는, 용이 살고 있다는 사냥터에도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방학은 짧았다. 방학 내내 열심히 했지만 레벨은 고작 15를 넘지 못했다. 다음 방학에 이어할라치면 정보들이 쌓여 스탯을 잘 못 찍었다는 걸은 깨닫곤, 혹은 다른 직업을 선택하고 싶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또 한 번의 방학을 열심히 해도 레벨은 15정도였다. 그러면 또 방학이 끝났다. 고레벨들의 세상은 아득하기만 했다.


고등학생이 되었지만 그 한을 풀지 못했다. 어느 날 세뱃돈을 받았던 나는 큰 결심을 했다. 레벨 99 짜리의 전사 아이디를 구매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때 돈으로 10만 원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액제까지 가입했다. 이제 그들의 세상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고, 고레벨의 무리에서 어울려 다녔다. 첫 사냥을 갈 차례였다. 유저들이 직업별로 파티원을 구하고 있었다. 마침 전사 한 자리가 비어있었다. 그들은 나의 레벨과 옷차림을 보고 파티원으로 받아주었다. 난생처음 용이 산다는 던전으로 향했다.


괜히 고레벨들이 아니었다. 용 한 마리를 잡는데도 눈부신 팀워크가 필요했다. 맨손 전투의 대가인 무도가는 용에 달라붙어서 주먹과 발차기를 휘둘렀고, 도적은 빠른 공격으로 적의 급소를 찔러댔고, 마법사는 눈부신 마법으로 적을 쉴 새 없이 몰아붙였으며, 성직자는 다친 파티원들을 치료해주었다. 전사의 역할은 현란한 검술로 적에게 타격을 입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스킬이라곤 막대기와 단검으로 초보 사냥터에서 지렁이 같이 생긴 뱀과 사마귀를 잡아본 경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사냥을 엉망으로 만들고 말았다.


"도대체 뭐 하는 거예요!" "아 진짜 짜증 나네." "아이디 샀어요?" 나는 결국 그들에게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파티원이 되어 사냥터로 떠났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돈으로는 레벨 80만큼의 경험과 노하우를 살 수 없던 거였다. 레벨 99였지만 내가 익숙하고 가장 잘하는 곳은 초보 사냥터였다. 마음의 고향 같은 초보 사냥터로 향했다. 모든 몬스터가 일격에 쓰러졌다. 사냥을 하며 빠르게 물약을 마시고, 스킬을 쓰며 일격을 가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며 물약을 마시는 그런 스릴이 하나도 없었다.


"왜 여기 와서 사냥 방해하세요!" "뭐야 여기 왜 왔대." "우리 방해하지 말고 다른 데 가세요!" 저레벨 유저들은 내게 불만을 토로하며 쫓아냈다. 레벨 99의 유저가 되었지만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그토록 친구가 되고 싶던 유저들과는 어울릴 수 없었고, 그동안 익숙했던 세계에서는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조금씩 레벨업 하는 성취도,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사냥하는 재미도, 비슷한 레벨의 유저들과 함께 성장하는 보람도 하나도 없었다. 레벨 99의 껍데기일 뿐이었다. 결국 나는 어둠의 전설의 흥미를 잃고 아이디를 팔아버렸다.


요즘 들어 어둠의 전설에 빠졌던 그 시절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그때처럼 하루빨리 레벨 99가 되고 싶은 조급함에 쫓겨서 그러는 걸지도 모르겠다. 얼른 첫 작품보다 더 나은 장편소설을 쓰고 싶다. 구상했던 사상서를 하루빨리 완성하고 싶다. 문학상도 받고 가르침을 준 교수들에게 인정도 받고 싶다. 그 순간을 상상하면 마음이 조급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 순간에 이르지 못해서 천만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종종 생각을 해보곤 한다. 만일 지난날, 정말 절실했던 그 순간에 응모했던 대회에서 문학상을 탔더라면?


끔찍하기만 하다. 고작 그런 걸로 상 받았다고 거들먹거리다 도태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낙방의 연속이어서 정말 천만다행일 뿐이다. 나를 받아주지 않는 세상에 감사할 따름이다. 아직도 나는 더 많이 읽어야 하고, 사유해야 하고, 사상들을 적립해 나가야만 한다. 오늘도 나는 고레벨들의 던전에서 용을 마주치며 어버버 거리는 게 아니라, 내게 어울리는 사냥터에서 그저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한다. 그저 소망해본다. 일순간의 요행을 기대한다거나, 갑자기 목적지에 도달하길 바라는 조급함을 다스릴 넓고 고요한 마음이 생기기를.



instagram@leewoo.dem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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