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우, 포르투갈을 종단하다. 그 다섯 번째 이야기.
포르투갈의 8월은 뜨거웠다. 푸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했고, 햇살은 그야말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떠오르는 태양이 반가웠다. 홀로 새벽의 리스본을 가로지르는 건 외로운 일이었다. 비가 내릴 때 거리의 채도가 한층 짙어지는 것처럼, 어둠이 내린 텅 빈 거리는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것이 서글펐다. 순례를 시작으로 외국에서 일 년 동안 지내겠다며 쉽게도 버린 사랑이며, 어느 것 하나 손에 잡지 못한 채 막바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 나의 이십대며 그 모든 것들이 서글펐다. 하지만 온 세상을 환히 밝히며 떠오르는 태양은 모든 우울을 증발시켰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해의 일출을 보기 위해 밤을 지새우며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일렁이며 떠오르는 햇살은 삶에 온갖 희망을 품게 한다. 길을 걷던 나도 금세 희망으로 가득 차 올랐다. 나는 지금 멋진 모험을 하고 있으며, 꿈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라고 굳게 믿었다. 발걸음은 다시 경쾌해졌고, 땀 흘리며 걷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행복했다. 하지만 따스한 희망을 선사해준 햇살은 점점 뜨거워졌다. 오전 11시 즈음에 수은주는 벌써 38도를 가리켰다. 이정표도 없어 몇 번이나 길을 잃었다. 아침으로 빵과 커피를 먹을 생각이었는데 마땅한 가게도 찾지 못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나는 점점 지쳐갔다.
게다가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번 순례길에 물집이 잡힐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순례의 경험이 있던 나는 물집이란 순례길에 불가피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방하고자 했다. 물집은 신발이 너무 새 거여서 길들여지지 않았을 때 생긴다. 순례를 앞두고 나는 트레킹화를 신고 생활했다.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할 때도 트레킹화를 신고 걸었으며, 러닝 머신을 뛸 때도 트레킹화를 신었다. 하지만 치밀한 사전 준비에도 불구하고 물집이 생기고 말았다. 걸음은 이내 느려졌으며 커지는 물집만큼 절뚝이기 시작했다.
리스본을 떠나 처음으로 삼았던 목적지는 알베르카 도 히바테주(Alverca do Ribatejo)였다. 리스본으로부터 25km를 걸어야 하는 길이었다. 아침도 먹지 못했고, 내리쬐는 여름 햇살과 점점 커져가는 물집 때문에 나는 점점 거북이걸음으로 걸어야만 했다. 아무래도 쉬어야 할 것 같아 적당한 곳이 나오기를 고대하며 계속 걸었다. 드디어 어느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건물이 만들어주는 그늘로도 충분했다. 차도와 인도를 가르는 경계석에 기대앉았다. 배낭을 벗고 땀을 식혔다. 잠시 일기장을 꺼내 여정을 기록했다. 되는 일이 없었다. 갑자기 펜이 나오질 않았다. 펜을 흔들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잠시 후 누군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낯선 여인이었다. 그녀는 내게 시원한 생수 한 병과 새 볼펜 하나를 내밀었다. 내가 무슨 영문인지 묻자 그녀는 내가 다 쓴 펜을 가리키며 말했다. "펜이 안 나오는 것 같던걸요?"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눈을 꿈뻑이며 물었다. "저기에서 보고 있었거든요." 그녀는 미소와 함께 길 건너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는 작은 슈퍼마켓이 있었고, 유리창 너머에는 작은 티브이가 켜져 있는 카운터가 보였다. 아무래도 값을 지불해야 할 것 같아 지갑을 꺼냈다. "그러지 마요. 이건 선물이에요."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시원한 물 한 모금과 일기장에 남겨지는 문장들이 너무나 소중하게 다가왔다. 마음이 충전된 나는 다시 길을 나섰다. "부엔 카미노!"* 가게의 입구에 서서 큰 소리로 인사를 하는 그녀에게 나도 손을 흔들었다. 여정에 큰 응원을 받은 것만 같았다. 더운 것도, 지친 것도 잊은 채 부단하게 걸었다. 물집 때문에 절뚝거렸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저녁 시간이 가까워졌을 무렵, 리바테호의 소방서에 도착했다. 쭈뼛쭈뼛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기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을까요." "미안해요. 오늘은 순례자를 받아줄 수가 없어요." 리셉션에 앉아있던 남자 소방관은 무척이나 사무적으로 말했다.
그는 다음 마을인 알한드라(Alhandra)의 소방서에서 여정을 풀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지도를 보니 5km가 떨어져 있었다. 적어도 한 시간은 더 걸어야 했다. 아니 절뚝이는 걸음으로는 두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벌써 저녁이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얼른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다시 길을 나서려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왜 절뚝거려요?" 돌아보니 한 여자 소방관이 서 있었다. "물집이 났거든요." 자신을 딜리아라고 소개한 그녀는 잠시 보자며 나를 끌고 가다시피 해 의자에 앉혔다. "얼른 신발 벗어봐요." 나는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그녀는 발바닥에 난 물집을 보더니 일어나 구급함과 수건을 가져왔다.
"이 상태로 어떻게 걸었어요?" 딜리아는 나의 발을 따뜻하게 적신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그리고 구급함을 열어 주사 바늘과 거즈를 꺼냈다. 정성스레 물집을 치료해주고 소독까지 해주었다. "정말 고마워요." 나는 인사를 하며 급히 양말을 신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저지하며 다시 발을 달라고 했다. 그녀는 나의 발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리고 바셀린을 듬뿍 발랐다. 그리고 발 마사지를 시작했다. "다음 마을까지 가게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지금 포르투갈 북쪽에 산불이 났거든요. 모든 인력이 대기 상태라 이곳에 발 디딜 틈이 없어요. 그래도 알한드라의 소방서에서는 묵을 수 있을 거예요."
딜리아의 부드러운 손길, 따스한 미소, 함께 나눈 소소한 이야기 덕분에 피로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사실 진짜 피로는 아니었다. 마치 밤새 시험공부를 하기 하면서 졸음을 쫓기 위해 마신 커피 한 잔 같은 기분이었다. 덕분에 남은 5km의 여정도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소방서 밖에까지 따라나와 배웅을 해주었다. "산티아고까지 무사히 도착하길 바랄게요!" 그녀는 한참이나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째서 이 사람들은 스치는 인연일 뿐인 내게 이렇게 진심을 다해서 대해주는 것일까. 나는 힘겹게 알한드라로 향하며 어쩌면 그녀들이 길 위에서 순례자를 기다리고 있던 천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부엔 카미노(Buen Camino) : 직역하면 '좋은 길'이란 뜻이며 통상 '좋은 여정 되세요'정도의 의미로 쓰이는 순례길의 인사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