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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 May 16. 2021

전시 사회

인스타그램부터 유튜브까지, SNS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대한 고찰

나는 지금 ‘전시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끊임없이 자신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지만 시대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고, 그런 조류가 세상을 주도하고 있다. 적자 생존. 적응하지 못 하면 도태되고 퇴화되어 간다. 나 또한 시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의 인간이다. 카톡 프로필부터 인스타그램의 피드와 스토리, 블로그, 유튜브까지 나를 전시할 수 있는 채널에 나를 전시하며 살아가고 있다.


얼마 전, 성수의 한 카페에서 인플루언서 커플을 우연히 만났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만난 건 아니고 목격한 것이다. 그들은 인스타그램에서 도합 20만의 팔로워를 보유한 이들이었다. 나 또한 팔로우하는 사람들이기에 연예인을 보는 것처럼 신기했다. 한 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그들을 본의아니게 관찰하게 되었다. 그들은 내가 지켜보는 내내 카페를 돌아다니며 서로의 사진과 영상을 찍어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문한 아이스 커피는 채 마시기도 전에 얼음이 다 녹아 있었다.


제작의 현장에 있었던 나는 잠시 후 인스타그램에서 그들의 결과물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사각의 프레임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들의 노고가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나는 어째서 그들이 인플루언서들인지 납득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잘 전시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개인전에 출품할 작품을 주제에 맞게 잘 만들어내는 작가들이나 다름 없었다. 이 전시를 위해 그들은 사각의 프레임 밖에서 엄청난 노력을 쏟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카페에서 마주한 그들의 노력은 빙산의 일각에 불가했으리라.


언젠가는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30만을 보유한 한 작가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제 자신이 만든 이미지에 갖혀 있는 하나의 전시품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업데이트되는 게시물마다 변동하는 좋아요와 댓글 수에 기분이 좌지우지된다고 했다. 좋아요를 덜 받는 날에는 자신이 잘 못 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무얼 더 보여줘야하는 건지 조바심이 든다고 했다. 인기로 인해 행복하지만, 동시에 심리적인 압박을 받는다고 했다. 긍정적으로 보자몉 이러한 압박이 작가로서 정진하는데 도움이 된다고도 했다.


얼마 전에는 글을 쓰는 동료 작가분과 만나 이와 같은 범주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유튜브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다.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내 만든 책 리뷰보다 반나절만에 뚝딱 만든 브이로그가 훨씬 인기가 많다고 말이다. 그는 말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책 속의 진지한 작가의 모습이 아니라 유쾌하고 힙한 작가의 모습이라고. 그도 나와 같은 고민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대화 끝에 합의에 도달했다. 글쓰는 작가로서의 고루하고 진지한 모습을 몽땅 작품 속에 쏟아 넣고, 우리는 책을 들고 세상 앞에 조금 더 경쾌하고 재미있고 힙해지자고.


작가의 패러다임도 변해가고 있다. 예전에는 홀로 은둔해 고민하고 작품을 집필하는 게 진정한 소설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다.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런 작가가 존재하는지 조차 모를 테니까. 때문에 오늘날의 ‘유능한’ 작가의 덕목은 아이러니하게도 작품성보다는 전시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일례로 나는 근래 문학상을 받은 작가보다 더 ‘훌륭한’ 작가를 알고 있다. SNS의 소통을 너머 이제는 예능까지 출현하는 인기작가와는 달리, 그는 구태여 자신을 그 어느 곳에도 전시하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시대의 기준은 전자를 더 ‘유능’하다고 여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글을 연재하는 브런치와, 나의 일면을 드러내는 인스타그램이 없었다면 작가로서 살아가지 못 했을 것이다. 이것이 어찌보면 작가로서 나의 포트폴리오였으니까. 이러한 고민을 담은 소설이 하나 있다. 바로 나의 신간 소설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페르소나를 위하여>>이다. 주인공 수림이 SNS의 모습과 실제 자신의 모습 사이에서 삶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현실에서 겪는 극심한 괴리감을 묘사한 작품이다. 무엇이 진짜 자신의 모습일까. ‘전시된’ 우리일까, ‘전시하는’ 우리일까. 소설을 통해 나는 우리는 전시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그 속에서 우리의 자의식이 역사상 유래없던 방식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다.


소설은 답이 아니라 문제의식이다. 나는 ‘페르소나를 위하여’의 문제를 여전히 안고 살아간다. 애석하게도 무대는 영원하지 않다. 연극의 상연이 회차를 거듭하며 된다 할 지라도 어김없이 매번 막은 내린다. 나는 종종 무대 뒤에서 의상을 벗고,  화장을 지우며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배우의 기분을 상상하곤 한다. 전시의 막이 내린 후의 나는 어떤 작가일까. 그것이 내가 요즘 고민하는 것이다. 텅 빈 수레가 되지 않는 것, 그러면서도 전시물의 리얼리티를 살리는 것, 나와 전시물의 경계를 허무는 것. 궁극적으로 나다워지는 것. 이렇게 나는 오늘도 전시 시대의 생존, 아니 실존 방법을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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