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메지의 동물원에서
히메지를 갔던 목적은 단 하나, 히메지 성을 보는 것이었다. 히메지 성을 둘러보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성을 나서며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찰나, 눈에 띈 것은 동물원 간판이었다. 원숭이, 코끼리, 기린 등의 형상이 조합되어 있는 귀여운 간판이 나의 동심을 자극하는 것만 같았다. 혼자라 조금 울적했던 나는 동물원에서 어떤 밝은 감정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내심 기대를 하며 티켓을 끊었다.
히메지 성 바로 옆에 있는 히메지 시 동물원. 나는 이곳도 세계문화유산이자 유명한 관광지인 히메지 성처럼 많은 관광객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동물원에는 인적이라곤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겨울이라 그런 걸까. 나는 옷깃을 여미며 홀로 동물원을 거닐었다. 바람은 매서웠지만, 햇살은 따뜻해 걷기 좋았다.
동물원에는 다양한 동물이 있었다. 홍학, 코끼리, 낙타, 곰, 사자, 호랑이, 독수리, 원숭이, 얼룩말, 펠리컨, 토끼, 기린 그리고 캥거루까지. 일본이라는 낯선 세계에서 홀로 여행 중이라 적잖이 외로웠지만, 따스한 햇살 아래 동물들을 바라보노라니 기분이 한결 좋아지는 것 같았다. 한데, 시간이 갈수록 동물원에서 뭔가 찝찝하고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애초 기대했던 어떤 따스함이 아닌, 기괴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것은 코끼리와 호랑이, 곰, 기린, 그리고 낙타를 보고 난 뒤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기이한 행동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코끼리는 마치 3/4박자를 타며 춤을 추는 것 같았는데, 머리와 코를 위아래로 흔들며 왼쪽 다리를 공중에 뻗었다 내렸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저 코끼리가 한때 서커스 단에서 활동했던 것일까, 그것을 추억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한참을 구경했지만 코끼리는 멈출 줄 모르고 마치 신들린 춤사위를 선보였다.
이번에는 호랑이를 보러 갔다. 호랑이 한 쌍은 다섯 평 남짓한 케이지에 갇혀 있었다. 내가 손뼉을 치고 신호를 보내도 그들은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다들 집중해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호랑이 한 마리는 작은 케이지를 마치 무한대의 기호를 그리듯 어지러이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또 다른 한 마리는 한쪽 구석에서 한쪽 벽면을 계속해서 왕복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신이 나간 듯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곰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호랑이와 같은 크기의 케이지에 갇혀있던 그들 또한 한 쌍이었다. 한 마리는 케이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자신의 머리를 창살에 쿵쿵쿵, 가볍게 찧고 있었다. 또 다른 녀석은 마치 화장실이 급한 것처럼 케이지를 정신없이 왕복하고 있었다. 기린도 낙타도 마찬가지였다. 기린은 울타리를 한 바퀴 돌고 커다란 집으로 들어간 뒤 다시 나와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낙타는 쇠창살을 입으로 쩝쩝 핥곤 게거품을 내며 침을 뱉었는데, 그 추잡한 행동을 계속 반복했다.
마치 동물원이 정신 병동 같았다. 너무나 기괴하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호텔로 돌아온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동물들의 이상행동에 대해 인터넷에 검색을 해본 것이었다. 놀랍게도 인터넷에는 동물들의 기괴한 반복적 행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심리학적 용어로 이것을 정형행동(stereotyped behaviour)이라고 했다. 이것은 같은 행동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제한된 공간에 갇혀있는 동물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히메지 동물원에서 마주했던 동물들의 기괴한 행동은 바로 정형행동이었던 것이었다.
놀랍게도 이 정형행동은 비단 동물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인간 역시 제한된 공간에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정형적’인 행동을 반복해서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공간적인 한계가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을 정신적으로 제약하게 된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치 담벼락 밑에서 햇살을 받지 못하는 나무가 잘 자라지 못하는 것처럼, 환경에 어떤 지대한 영향을 받는 것일까.
우리는 어렴풋이 환경이 사람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흔히들 사람을 판단할 때 가장 먼저 그 사람이 어디 출신인지를 따져 묻곤 한다. 그 사람 경상도 사람이라던데. 어쩐지. 그 사람 전라도 사람이래. 그럴 것 같더라니. 그 사람 강원도 사람이래. 그래 보이더라. 지역뿐만이 아니라 국적으로도 사람을 판단한다. 일본 사람은 대개 어떻다더라, 독일 사람은 대개 어떻다더라, 프랑스 사람은 대개 어떻다더라 하고 말이다.
이렇게 사람의 기질과 성격이 거주하는 나라와 지역에 영향을 받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각자의 집에 살고 있는 우리는 개인적인 공간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을까. 바로 풍수지리는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풍수지리는 집터를 둘러싼 산의 형상과 지세(地勢), 물길의 방향 그리고 방위에 따라 살게 되는 사람의 성격과 기질은 물론 운명까지 좌우된다고 이야기한다. 풍수학자들이 예들 들기 좋아하는 것은 경주 교동 최씨 고택이다. 그들은 경주 교동 최씨의 1대 최진립 장군부터 12대 최준 선생까지 부자로 살 수 있었던 이유를 주거환경, 즉 집터로 꼽고 있다.
풍수지리는 비과학적, 혹은 경험의 과학이라 할 수 있는 학문이기에, 너무 결과론적이고 또 운명론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과연 주위 환경에, 주거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만일 풍수지리가 보는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가 환경으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는다면, 우리가 하는 습관처럼 하는 어떤 행위들은 어쩌면 정형행동에 가까운 것들은 아닐까.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SNS에서 허덕이고, 금요일 밤마다 번화가로 향하며, 휴일마다 핫플레이스를 찾아다는 우리. 당연시 여기는 습관적 행위들.
문득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만났던 일본 고등학생들이 떠올랐다. 그들에게 카메라의 메모리 카드를 살 수 있는 곳을 물었더니, 그들은 나를 도와주고 싶었던지 여기저기 상점들로 나를 직접 안내해주었다. 결국 메모리 카드는 찾지는 못했지만 삼십 분 남짓 그들과 함께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야구부 원인 그들은 꿈에 대해 말했다. 자신들은 이치로처럼 훌륭한 야구 선수가 될 것이라고. 호텔방에 누워 그들의 꿈을 곱씹어 보았다.
그런데 사실 그들의 멋진 꿈도 그들이 나고 자란 세계에서 보고 들었던 것에 불과하지 않던가. 어린 시절부터 보았던 야구라는 스포츠에 몸을 담았고, 그곳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인 이치로를 동경한다. 어찌 보면 우리들이 꾸는 꿈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엄밀히 말해 우리는 보지 못했던, 알지 못했던 그 무언가를 꿈 꿀 수는 없는 것이다. 꿈조차 ‘정형적’으로 꾸는 것이다. 우리는 저 히메지의 동물들처럼 ‘한정적’인 환경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우리는 ‘정형인간’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우리는 전혀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