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LEE플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연 Aug 02. 2023

6시간 30분 31초 동안의 알츠하이머

[음악] The Caretaker의 'EATEOT' 앨범

죽는 순간에 선곡을 할 수 있다면 재생하고 싶은 노래라고 생각했다. 「Everywhere at the end of time」 앨범의 첫 번째 곡인 'It's just a burning memory'였다.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 배경 음악으로 깔리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곡이었다.


그렇게 정든 인디 음악을 모두 넣어두고 가사조차 없는 3분 33초짜리 음악을 반복 재생하며 잠에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ASMR도 반복해서 듣다 보면 효과가 떨어지곤 한다. 그날은 유독 잠이 오지 않아서 가수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괴짜로 유명하다고 했다.


보통 천재들에게 이런 칭호가 붙기 마련이다.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 앨범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 고상하게 재생할 만한 음악이 아니었다.


When work began on this series it was difficult to predict how the music would unravel itself. Dementia is an emotive subject for many and always a subject I have treated with maximum respect.
Stages have all been artistic reflections of specific symptoms which can be common with the progression and advancement of the different forms of Alzheimer's.

이 시리즈에 작업을 시작했을 때, 음악이 어떤 식으로 표현될지 예측하기 어려웠습니다. 치매란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감정을 일으키는 주제이며, 저에게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주제였죠.
각 스테이지는 다양한 종류의 알츠하이머 병이 진행됨에 따라 흔히 발생하는 각각의 질병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The Caretaker, 작가 코멘트.


이건 2016년부터 2019년까지 6차례에 걸쳐서 공개된 알츠하이머 시리즈였다.   






STAGE 1




Here we experience the first signs of memory loss. This stage is most like a beautiful daydream. The glory of old age and recollection. The last of the great days.

우리는 여기서 기억상실의 첫 징후를 경험합니다. 이 단계는 가장 아름다운 백일몽과 같습니다. 과거의 영광과 회상, 위대한 날들의 마지막.


앨범에 대한 작가의 코멘트를 읽고 조금 놀랐다. 그렇지 않아도 위에서 인생의 주마등에 관해 언급했었는데 필자를 포함한 수많은 청자들의 감상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비하인드였다. 다만, 이어질 비극적인 사건의 시작이 되는 곡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오싹해졌다.


참고로 곡 앞에 붙여진 넘버링(A1, A2 등)은 치매의 실제 진행도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A1 It's just a burning memory (그저 불타는 기억일 뿐)

A2 We don't have many day (우리에겐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A3 Late afternoon driftin (늦은 오후가 흐르고)

A4 Childishly fresh eyes (아이 같은 맑은 눈)

A5 Slightly bewildered (약간 당황한)

A6 Things that are beautiful and transient (아름답고 일시적인 것들)


B1 All that follows is true (따라오는 모든 것들이 진실)

B2 An Autumnal equinox (추분)

B3 Quiet internal rebellions (조용한 내적 반항)

B4 The loves of my entire life (내 인생에서 사랑했던 모든 것들)

B5 Into each others eyes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B6 My heart will stop in joy (내 심장은 행복에 멈출 거야)





STAGE 2




The second stage is the self realisation and awareness that something is wrong with a refusal to accept that. More effort is made to remember so memories can be more long form with a little more deterioration in quality. The overall personal mood is generally lower than the first stage and at a point before confusion starts setting in.

둘째 단계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깨달음과, 그것을 부정하려는 시도입니다. 기억이 더 오래 남을 수 있도록 더 많은 노력이 들어가며, 그 과정에서 기억이 조금 더 망가집니다. 전체적 기분은 첫째 단계보다 더 낮은 편이며, 혼란이 들어앉기 전의 지점에 있습니다.


이쯤에서 구글에 The Caretaker의 이름을 검색한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함께 밤을 새워 주던 자장가를 잃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대로 앨범을 끝까지 재생하면 다시는 어두운 새벽에 It's just a burning memory를 듣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STAGE 2는 앨범 사진처럼 '시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최악의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희망이 꺼지기 직전인 불씨처럼 간당간당하게 연명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엔 아무런 방패도 없이 절망을 몇 번이고 마주해야 한다.


C1 A losing battle is raging (지는 싸움이 몰아친다)

C2 Misplaced in time (시간에 잘못 놓인)

C3 What does it matter how my heart breaks (내 마음이 어떻게 망가지든 무슨 상관인가)

C4 Glimpses of hope in trying times (고난의 시기에 얼핏 보이는 희망)

C5 Surrendering to despair (절망에 굴복하다)


D1 I still feel as though I am me (나는 아직 나를 나라고 느껴)

D2 Quiet dusk coming early (이르게 찾아오는 조용한 황혼)

D3 Last moments of pure recall (마지막 온전한 회상의 순간들)

D4 Denial unravelling (무너지는 부정(否定))

D5 The way ahead feels lonely (앞으로의 길이 외로이 느껴진다)





STAGE 3




Here we are presented with some of the last coherent memories before confusion fully rolls in and the grey mists form and fade away. Finest moments have been remembered, the musical flow in places is more confused and tangled. As we progress some singular memories become more disturbed, isolated, broken and distant. These are the last embers of awareness before we enter the post awareness stages.

여기서 우리는 혼란이 온전히 자리 잡고, 회색 안개가 만들어지고 흩어지기 전의 마지막 형용 가능한 기억들을 보게 됩니다. 가장 소중한 순간들이 기억되고, 음악적 흐름이 군데군데 뒤틀리고 엉켜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 외딴 기억들이 더 교란되고, 격리되고, 부서지고, 동떨어집니다. 이 모든 것은 탈인식 단계에 진입하기 이전 인식의 마지막 불씨입니다.


치매 환자는 감정조절을 잘하지 못한다. 그런 현상을 표현하듯 시끄러울 정도로 밝은 곡 뒤에 우중충한 곡이 배치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앨범 전체에서 STAGE 3가 가장 섬뜩하고 불쾌하다고 한다.


'그 정도는 아닌데'라고 생각했지만, 필자 역시 1분 만에 일시 정지 버튼을 눌렀다. 참고로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은 오전 10시 13분이다. 햇빛이 들이치는 창문 밖에서 매미 우는 소리가 들리지만 다시 재생 버튼을 누를 용기가 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파티 테이블 아래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느낌이다', '녹아내린 가족사진 속에 있는 것 같다'던 사람들의 반응이 기억에 남는다.


E1 Back there Benjamin (그곳에서 벤자민)

E2 And heart breaks (그리고 마음이 부서진다)

E3 Hidden sea buried deep (깊숙이 묻힌 숨겨진 바다)

E4 Libet's all joyful camaraderie (리벳의 즐거운 동지애)

E5 To the minimal great hidden (숨겨진 작고 위대한 것들에게)

E6 Sublime beyond loss (잃음 너머의 장엄함)

E7 Bewildered in other eyes (타인의 시선에 당황한)

E8 Long term dusk glimpses (기나긴 황혼이 얼핏 보인다)


F1 Gradations of arms length (팔 길이의 그라데이션)

F2 Drifting time misplaced (잘못 놓인 흐르는 시간)

F3 Internal bewildered World (내면의 혼란스러운 세계)

F4 Burning despair does ache (타오르는 절망이 고통스럽다)

F5 Aching cavern without lucidity (선명함이 없는 아픈 공허함)

F6 An empty bliss beyond this world (이 세상 밖의 공허한 행복)

F7 Libet delay (리벳 지연)

F8 Mournful camaraderie (애절한 동지애) 





STAGE 4




Post-Awareness Stage 4 is where serenity and the ability to recall singular memories gives way to confusions and horror. It's the beginning of an eventual process where all memories begin to become more fluid through entanglements, repetition and rupture.

탈인식 4단계는 평온함과 단발적 기억을 회상할 수 있는 능력이 혼란과 공포에게 자리를 내주는 순간입니다. 모든 기억이 얽힘과 반복, 부서짐으로 인해 흐르기 시작하는 작용의 시작입니다.


차라리 영화관에 혼자 앉아서 공포영화를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탈인식'이라는 말이 이렇게 무서울 줄 몰랐다. 사실 모르고 들으면 평범한 도시의 소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14분 24초부터 굉음처럼 뭉개진 Granada 오케스트라가 터져 나온다는 설명을 읽고 나니 마저 들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


이때부터는 곡의 제목도 변화를 보인다. '나는 아직 나를 나라고 느껴', '기나긴 황혼이 얼핏 보인다'처럼 하나의 문장이던 제목들이 4단계부터는 어떠한 명칭처럼 변한다.


G1 Stage 4 Post Awareness Confusions (4단계 탈인식 혼란)

H1 Stage 4 Post Awareness Confusions (4단계 탈인식 혼란)

I1 Stage 4 Temporary Bliss State (4단계 일시적 행복의 순간)

J1 Stage 4 Post Awareness Confusions (4단계 탈인식 혼란)





STAGE 5


 


Post-Awareness Stage 5 confusions and horror. More extreme entanglements, repetition and rupture can give way to calmer moments. The unfamiliar may sound and feel familiar. Time is often spent only in the moment leading to isolation.

탈인식 5단계 혼란과 공포. 더욱 격렬한 얽힘, 반복과 부서짐이 가끔 평온한 순간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낯선 것이 익숙하게 들리거나 느껴지기도 합니다. 시간은 오로지 그 순간에만 할애되며 이는 고립으로 이어집니다.


더 나아가서, 5단계부터는 치매 임상 용어를 대놓고 제목에 인용한다. 치매가 중증으로 진행되었음을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정말 무서운 부분은, 5단계의 마지막 곡인 N1이다. 치매 환자의 공포나 혼란 같은 감정마저 소실되어 버리고 소음만이 남게 된다고 한다. 공포스러운 감정마저 사라진 인간을 대체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단순히 '알츠하이머 환자'라고 하기에는 당사자들이 느낄 심정이 광활하게 느껴진다.


K1 Stage 5 Advanced plaque entanglements (5단계 악화된 플라그 얽힘)

L1 Stage 5 Advanced plaque entanglements (5단계 악화된 플라그 얽힘)

M1 Stage 5 Synapse retrogenesis (5단계 시냅스 기능 소실)

N1 Stage 5 Sudden time regression into isolation (5단계 고립으로의 갑작스런 퇴행)





STAGE 6




Post-Awareness Stage 6 Is without description.

탈인식 6단계는 설명이 없습니다.


6단계는 소음으로 이루어진다. 단 O1에서는 자주 사용되던 샘플이 짤막하게 지나간다. 잠시 정신이 돌아오는 순간을 표현한 듯하다. 단 몇초의 선율이 잔인하게 느껴진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모든 소음이 끊기고 오르간 소리가 들리다가, 피아노 소리와 합창단의 노래가 작은 소리로 이어진다. 해당 부분은 '장송곡'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회광반조'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마저 끝난 후에는 약 1분 정도의 온전한 정적이 찾아온다. 이것은 대상의 임종을 의미한다.


회광반조란 빛을 돌이켜 거꾸로 비춘다는 뜻의 불교 용어이다. 사람이 죽기 직전에 잠시 기운을 차리는 상태를 비유하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한다. 치매 환자가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망하거나, 방사선에 피폭된 사람이 일시적으로 회복했다가 사망하는 경우에 이러한 표현이 쓰인다.


O1 Stage 6 A confusion so thick you forget forgetting (6단계 잊는다는 것을 잊을 정도로 짙은 혼란)

P1 Stage 6 A brutal bliss beyond this empty defeat (6단계 이 공허한 패배 너머의 잔혹한 행복)

Q1 Stage 6 Long decline is over (6단계 긴 쇠퇴의 끝)

R1 Stage 6 Place in the World fades away (6단계 이 세계의 자리가 사라져 간다)





감상을 마무리하며



가까운 가족이 치매를 겪은 적이 있어서 앨범이 낯설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중간에 감상을 시작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지만, 소개 글을 전부 읽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당시에 할아버지의 기분이 어땠을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치매는 현존하는 질병 중에서 가장 무참한 병이라고 생각한다. 당사자는 자신의 정신 속에 갇혀서 우주 미아처럼 떠돌아야 하고, 주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도와줄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고통스럽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치매가 불시에 벼락처럼 떨어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예방이 가능한 질병이라는 것이다. 「Everywhere at the end of time」 앨범에 대한 관심이 주변 사람과 본인의 치매 예방으로 이어진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을 들으며 느낀 공포를 치매에 대한 경계로 승화시키기를 바란다. 부모님의 기억력이 떨어지는지 살피며 조기에 진료를 받으실 수 있도록 돕고, 본인 역시 적절한 대인관계와 사회활동을 유지하며 두뇌를 활발히 사용하자.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불행 속으로 들이닥치는 너를 허락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