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Review
조그만 바늘이 얼마나 강력한 도구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한의사들은 손가락보다도 가는 침으로 환자를 치료한다. 실 만한 굵기의 빳빳한 바늘의 사람을 이롭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급소에 잘못 꽂았다가는 사망까지 이를 수 있다. 이뿐이 아니다. 실수로 손에 찔렸다가 파상풍에 이를 수도 있는 위험한 도구다.
이처럼 극단적인 성격을 가진 바늘이지만 실생활에서도 특이하지 않게 쓰인다. 구멍 난 양말을 아쉬움 없이 휴지통에 넣어버리는 요즘 같은 세상에 그 쓸모가 덜하기는 하다만, 그렇다고 없으면 아쉬운 것이라 대부분의 집안 한구석에 바늘과 실이 마련되어 있다.
바늘은 실로 여러 쓸모를 가지고 있다. 집의 어두컴컴한 구석 어딘가를 굴러다니는 바늘. 하지만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바늘.
그리고 우리네의 삶과 이상을 찬란하게 그려내기도 하는 바늘.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전시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에서 바늘로 자아낼 수 있는 최대의 황홀경을 선사한다.
한국자수는 무려 이천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교류 속에서 독특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꽃피운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수는 낯설다. 특히나 근현대 자수는 더 그렇다. 19세기 이후 격변의 시기를 거치며 변화한 자수의 흐름은 주류 미술사의 관심 밖에 놓여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자수 작가와 작품을 발굴, 소개한다. 뿐만 아니라 자수 실천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도 흐름에 따라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첫 번째 전시실에서는 「백번 단련한 바늘로 수놓고」라는 제목을 가지고 19세기~20세기 초에 제작된 자수로 시작한다. 조선시대의 자수는 크게 도화서의 화원이 그린 밑그림으로 궁녀들이 수놓은 궁수(宮繡)와 민간 여성들이 제작한 민수(民繡)로 나뉜다. 궁수는 고아한 기풍을 풍긴다면, 민수는 세련된 맛은 덜하지만 자유분방한 구도와 강렬한 원색대비가 두드러진다.
두 번째 전시실은 「그림 갓흔 자수」로, 교육과 전시를 통해 '미술공예'로 거듭난 자수 실천의 변화를 살펴본다. 사적 영역이었던 자수는 어느새 여성 교육의 핵심으로 부각되었다.
세 번째 전시실에서는 「우주를 수건(繡巾) 삼아」라는 제목으로, '추상화'와 '전통의 부활'이 공존하는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다. 많은 작가들이 비단 외의 다양한 재질의 바탕천과 실, 그리고 의외의 재료를 사용하여 전통적인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추상을 실험했다.
마지막 전시실에서는 「전통미의 현대화」를 제목으로, 전통 자수의 계승과 현대화를 주제로 한다.
사실은 대부분의 전시가 낮은 시력으로 감상하기엔 아쉬운 감이 있겠지만, 이번 국현미 자수전에서는 특히나 그렇다. 정교하고 섬세하게 수놓아진 실들을 보고 있자면 감탄이 절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시력이 높은 사람도 거북이처럼 목을 내밀고 감상하는 것이 이번 자수전이다.
'꽃잎 하나하나'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다. 이파리는 물론이고 꽃잎도 모자라서 암술과 수술을 정교하게 자아냈다. 멀리서 보면 한 폭의 그림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규칙을 가진 실들의 향연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들었을까.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았을까. 그런 감탄과 존경을 몇 번이고 입 밖으로 내뱉게 되는 작품이었다.
부위별로 표현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도 하나의 포인트가 됐다. 나무의 잎들은 둥글고 얇게 표현하여 고개를 갸웃거릴 때마다 광택이 돌았다. 반면에 새의 모습은 조금 더 둔감하지만 촘촘하게 표현하여 비단과 같은 느낌을 냈다. 다채로운 표현이 보는 이의 눈을 더욱 즐겁게 만들어 준다.
게다가 유화 그림과 다른 점은, 자수의 특성상 입체감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마치 실제와 같은 나뭇가지의 표현이 놀라웠다. 그 위에 올라가 있는 다람쥐 역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져서, 당장이라도 그림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자수가 입체감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영리하게 활용한 작품들이 바로 세 번째 전시실에 있다. 실을 마구 자르고 번지게 만들어서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으니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직접 확인해 보길 바란다.
나는 자수라는 문제를 단지 바늘과 실을 이용한다고 해서 공예라는 테두리 속에 꼭 들어가야 한다는 것도 오늘날에 와서는 다소 문제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현대자수는 좀더 표현기법이나 발상이 자유스럽게 처리되어야함은 물론 그 작품 자체가 하나의 장식성을 뛰어넘어 그 나름대로 작가의 이미지가 표현되지 않으면 안될 줄 안다.
/송정인, 「회화의 경지로 엮는다」, 1980
우리 것은 자기 재주대로, 그저 멋대로, 바느질이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만든 것이다. 동그랗게 수놓으려 했지만 완전하게 동그랗지 않고 좀 찌그러진다. 기교적 완벽성을 실현하지 못했을망정 우리는 색색 실의 독특한 색감을 잘 살려가면서 대상에 상관치 않고 수를 놓았기 때문에 예술적 완벽성은 한결 높다고 말할 수 있다. 멋대로 놓아서 오히려 현대적인 것이 되고 만 것이 내 마음에 든다.
/김종학, 「민예품 수집의 즐거움」, 2004
조선시대의 자수는 생활주변에서 가장 영롱한 일면이나 색채와 구성이 수천 년간 여인들의 애틋한 안목과 애환과 정성으로 세련되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자수와 비교하여도 우리의 특색이 어엿하여 보는 이의 마음을 때로는 화사한 꿈길로 인도하여 즐겁게 하며 때로는 대담한 구성과 색의 조화로 마음 속을 탁 트이게 하기도 한다.
/최순우,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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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 들여 수놓은 자수를 구경할수록 작품 자체보다는 그 이면에 있는 사람에 집중하게 됐다. 대체 어떤 생각을 하며 작품을 완성했는지, 혹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는지. 자수를 뭐라고 설명하고 싶은지. 전시장 한쪽에 새겨져 있는 글귀들로 그들의 생각을 얼핏 엿볼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부족했다.
하지만 점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화가들이 물감으로 말하듯이 이들은 바늘과 실로 이야기한다. 이미 하고 싶은 말들을 잔뜩 수놓아 놓았으니 한 폭의 그림 앞에 서서 직접 느끼고 배우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이 들었을 때쯤엔 이미 마지막 전시관을 돌고 있던 중이라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 덕수궁을 다시 찾으려 한다. 사람이 한적한 평일 오전에 색색의 실을 수놓은 천을 사이에 두고 그 뒤의 사람과 소통하고자 한다. 전시는 2024년 5월 1일부터 8월 4일까지 이루어진다. 그러니 이들의 목소리가 궁금하다면 함께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아서 눈을 기울여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