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홍콩댄스컴퍼니 대형 창작 무용극 '24절기' Review
지난 19일, 서초구의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순식간에 사계절이 흘렀다. 인터미션도 없이 이어진 85분의 공연 동안 밀도 있는 계절감을 느꼈다. 순백으로 피어나는 봄부터 많은 것이 땅으로 돌아가는 겨울까지. 고대부터 이어진 정교한 시간의 질서를 이만큼이나 현대적으로 재창조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여운을 안은 채로 집에 돌아와서 찾아보니, 무대 위에서 24절기를 표현하기 위해서 많은 이들의 노력이 들어갔다.
이번 공연인 「천상의 리듬의 춤 - 24절기」는 홍콩댄스컴퍼니의 대형 창작 무용극으로, 홍콩특별행정구 정부 레저문화서비스부와 공동 주최한 것이다. 홍콩무용단은 지난해에 홍콩댄스어워즈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다. 홍콩 내에서 인정받은 최고의 팀이 자국의 든든한 지원을 등에 업고 한국까지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이번 공연은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아티스트들이 함께 참여했다. 민천홍 의상 디자이너의 아름다운 의상, 김철환 작곡가의 서정적 음악, 류백희 조명 디자이너의 감각적인 빛이 홍콩무용단과 황홀하게 어우러졌다.
24절기라는 공통점을 가진 서로 다른 국가, 한국과 홍콩이 예술을 통해서 하나가 되었던 공연이었다. 그 현장에 함께했던 관객의 관점에서 리뷰를 써보고자 한다.
무용 공연이라는 정보를 접하면 아무래도 사전에 기대하는 부분이 단편적이다. 유려하다가도 강렬해질 몸짓을 상상하며 설렘을 부풀린다. 손끝의 디테일까지 신경 쓰는 무용수들의 전문성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이로움을 끌어낸다.
하지만 이번의 감상을 통해서 '무용'이기 이전에 '공연'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무용수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최상의 아름다움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무대 뒤에 굉장히 많다는 것을 체감했다. 디자이너, 작곡가, 그리고 무용수는 각자가 잘하는 부분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며 동시에 누구 하나 튀지 않고 조화를 만들어낸다. 서로의 전문 분야는 달라도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가 동일하므로 물감이 섞이듯 자연스러운 작품이 탄생한다.
민천홍 의상디자이너는 이 작품에서 매우 간결한 실루엣과 무채색에 중점을 두었다. 봄에는 흰색과 투명한 소재를 사용하다가, 계절이 깊어짐에 따라 소재에 점점 부피감이 쌓이고 색도 진해진다. 시간이 점점 흐르고 겨울이 되면 새카만 검은색의 한복이 겹겹이 포개어져서 휘날린다.
사계를 표현하면서 다채로운 색을 적극적으로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특히나 봄은 많은 꽃들이 움트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렇기에 개나리를 연상시키는 샛노란 색이나 은은한 여운을 주는 분홍색을 수시로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디자이너는 이번 공연에서 절제를 선택하며 강렬한 유기성을 만들어냈다. 백(白)이 흑(黑)으로 점점 변해가는 모습은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류백희 조명디자이너는 작품이 진행되어 가면서 무대에 에너지가 쌓인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사계를 표현하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점점 고조되어 가면, 조명도 그에 따라 옷을 바꿔 입었다. 조명은 은은한 봄을 무대에 번지듯 표현하다가도 여름이 오자 모든 것을 태울듯 붉게 밝혔다. 가을에는 그림자가 길어졌고, 겨울은 백색의 조명에서 차가움이 느껴졌다.
또한, 김철환 작곡가에게 이번 작업은 유독 특별했다. 무용 음악의 경우 보통 안무가와 협의하며 작곡을 시작한다. 하지만 「천상의 리듬의 춤 - 24절기」에서는 예술 감독이 먼저 '자유롭게 음악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음악이 먼저 한 시간의 독립적인 세계관을 만들고 이후에 춤이 그 안에서 자유롭게 여행한 것이다.
작곡가가 선제적으로 자율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춤과 노래가 따로 놀지 않고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것을 보며 감탄이 나왔다. 특히 '양금'이라는 악기의 소리가 생소하면서도 듣기 좋았는데, 작곡가가 봄에 빗방울이 대지에 떨어지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악기라고 한다. 청아하게 두드리는 듯한 소리는 봄비를 완벽하게 담아냈다.
이처럼 아름다운 의상과 조명, 음악을 모두 하나로 아우른 것은 무용수들의 춤이었다. 거대한 자연을 인간의 몸에 담고자 하는 시도가 완벽하게 성공하는 것을 보며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말 없이 몸의 움직임만을 이용해서 관객들에게 사계절을 선사했다.
홍콩무용단은 1981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단체이다. 홍콩의 정통성을 그대로 승계하며 현대적인 예술적 비전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의의를 갖는다. 무려 200편이 넘는 제작물을 올리며 큰 찬사를 받을 정도로 무용에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 팀이기도 하다. 또한, 중국의 무용뿐만 아니라 무술에도 관심을 두며 이 둘을 융합하고자 심도있는 연구를 한다. 그리고 결과물로 독창적인 무용극인 「Convergence」 등을 창작하며 국경을 넘나들기도 했다.
홍콩무용단의 예술감독인 양윤타오(Yang Yuntao)는 중앙민족학원 무용과를 졸업한 후, 유명 무용단에서 전문 무용수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그러다 2002년에 홍콩무용단에 수석 무용수로 입단하였고, 2007부터 몸담고 있던 무용단에서 예술감독으로 본격적 활동을 시작하였다. 2023년에는 무용 창작과 중국 무용의 발전, 차세대 무용 인재 양성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홍콩특별행정구 정부 수반으로부터 명예훈장을 수여받았다.
많은 장면들이 아름다웠지만 봄의 시작을 알리던 초반의 안무가 가장 인상 깊다. 실루엣이 드러나는 흰 천을 두르고 엎드려 포개어져 있던 몸들이 피어나듯 일어나는 모습은 완벽하게 '개화'를 연상시켰다.
공기에 찬기가 섞이기 시작하는 지금의 가을은 시간이 되면 떠나고 입김을 자아내는 겨울이 올 것이다. 그런 겨울도 언젠가는 지나고, 모든 것을 녹이며 만물이 개화하는 봄이 다가올 것이 자명하다.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 속에서 모든 것은 순환한다.
그러한 반복이 덧없다고 좌절하는 대신,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두에게 전달하는 공연이었다.
어떠한 의미가 있을지는 각자가 찾기 나름이다. 필자의 경우에는 모든 것들이 살고, 죽고, 태어나는 혼란 속에서 증오나 혐오보다는 지속적인 안정을 느끼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공연 내내 느낀 평화로움을 삶에도 적용하고 싶었다.
타국의 무용수들이 이러한 의도를 전달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었다. 무대에 선 그들과 관객석에 앉은 사람들은 대부분 문화와 언어가 달랐지만 예술이라는 방식으로 소통했다. 85분 동안 이어진 말 없는 교감은 언어를 이용해서 서로에게 비수를 던지는 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덧없는 자연의 찰나에서 개인이 안정으로 가는 길에는 분명 공감이나 사랑, 용서와 같은 단어들이 존재할 것이다.
* 아트인사이트(https://www.artinsight.co.kr/)에서 티켓을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