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를 새로 쓰는 마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 그 후 4

by 이예은

제9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 발표가 났을 때, 나는 이미 민음사와 계약을 마치고 초고 완성이라는 막막한 과제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주인공이 된 황홀함에 도취되는 것도 잠시, 마법이 풀린 신데렐라처럼 현실로 돌아와 원고를 구상해야 했다.


사실 당선된 브런치북 <일본 콜센터에서 520일>은 책으로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해보지 못한 글이었다. 출판사와 처음 미팅을 갖기 전, 브런치북 원고를 하나의 워드 파일로 묶어 편집자님께 미리 보내드렸다. 당시에 확인한 글자 수는 겨우 3만 자(200자 원고지 약 150매). 애초에 출간을 염두에 두고 작성하지 않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몇 년 전에는 책 한 권을 만드는 데 약 20만 자(원고지 1,000매)가 기본이었다고 한다(물론 장르에 따라 달랐겠지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책 두께가 점차 줄어들어, 최근 출판된 에세이를 보면 보통 10~12만 자(원고지 500~600매)이고, 그 이하인 경우도 많다. 여기에 사진이나 일러스트가 들어가거나 시와 가까운 형태를 띤다면 훨씬 줄어든다. 당연히 글자 수보다는 내용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인 기준의 3분의 1 분량만 가지고 출간할 수는 노릇이었다.


글을 더 쓰는 건 재고의 여지가 없었다. 문제는 남은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였다. 내 브런치북은 코로나 시대, 일본 여행사 콜센터에서 520일 간 근무한 경험담이다. 제목처럼 입사에서부터 퇴사에 이르기까지의 에피소드를 시간 순으로 풀어냈으며, 여기에 다 담지 못한 내용은 주제별로 묶었다. 기존의 형식을 유지하되 팽창시킬지,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구성을 도입할지가 관건이었다.


두 분의 편집자 분들의 의견이 갈렸다. 내 마음도 갈렸다. 겨우 첫 미팅이었고 다른 이야깃거리도 많았으므로, 구성에 관한 논의는 '작가님께서 한 번 천천히 생각해 보셔요'라는 말로 일단락됐다. 특정 시기, 특정 공간에서 근무한 이야기이므로 시간 순으로 풀어내는 쪽이 가장 자연스럽고, 쓰기도 쉽다. 그러나 그런 책은 이미 차고 넘친다. 또, 내가 책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단순히 '이땐 이랬고, 저땐 저랬어요'와 같은 묘사가 아니다. 원하는 말을 하기에는 새로운 구성이 적합해 보였다. 비록 목차부터 다시 써야 했지만.


출간 원고에 관한 내 구상도 정리하고 출판사에 의견도 전달할 겸, 출간 기획서를 쓰기로 했다. 부끄럽게도, 지금까지 몇 권의 책을 내면서 단 한 번도 출간 기획서를 써보지 않았다. 1인 출판사 세나북스와 함께한 첫 두 권의 에세이는 나 외에도 공저자가 많았다. 세나북스 블로그에서 일본에 사는 작가를 모집했고, 그 소식을 <일본 소도시 여행>과 <늘 곁에 있어주던 사람에게>를 쓰신 박탄호 작가님께서 보시고는, 당시 블로그 이웃이던 내게 추천해주셨다. 책 쓰기에 대한 막연한 로망을 품고 있었던 나는 '저 할래요! 시켜주세요!'라고 손 들듯 세나북스 최수진 대표님께 어필해 기회를 얻었다. 내세운 건 쓰고 싶은 주제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기존 블로그 글뿐이었다. 그렇게 공저자로 쓴 책 <걸스 인 도쿄>와 <일본에서 일하며 산다는 것>이 나왔고, 대표님의 제안으로 단독 저자로 이름을 올린 첫 여행 에세이 <다카마쓰를 만나러 갑니다>까지 출간됐다. 그리고 그다음 정식 계약이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을 통해 성사됐으니, 출판사에 투고 경험이 전무했다. 운이 좋았다고도 볼 수 있으나, 그만큼 내가 준비성이 부족하고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미 계약까지 맺은 상황에 출간 기획서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겠지만, 직접 해보니 원고를 쓰기 전 방향을 잡기에 더없이 좋은 활동이었다. 양식은 인터넷에 무료로 게재된 수많은 표 중 하나를 사용했다. 출간 전인 원고이기에 자세한 내용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기획서에 넣은 항목은 다음과 같다.


제목(가제): 콜센터의 언어(민음사TV에 이미 공개됐고, 확정된 제목이 아니므로 밝힙니다)

분야: 한국 에세이

주제

기획 의도

시장 조사

차별성

타깃 독자

목차


주제와 기획 의도의 차이가 무척 혼란스러웠는데, 나는 주제를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에 대한 대답으로, 기획 의도는 '왜 그 이야기가 가치 있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또, 시장 조사 칸을 채우며 기존에 나온 콜센터 관련 서적을 살펴보았다(<콜센터>라는 소설을 오랜만에 다시 펼치기도 했다. 2018년에 나온 김의경 작가님의 소설을 읽을 때만 해도 내가 콜센터에서 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리고 이미 그 책을 읽은 사람들도 내 책을 새롭게 느낄 만한 이유를 차별성에서 서술했다. 타깃 독자는 단순히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사회인이 아닐까 생각했다. 사실 이 부분은 작가보다 출판사가 더 깊은 혜안을 갖고 있겠으나, '누구'에게 말하고 있느냐에 따라 글의 톤이 달라지므로 쓰는 사람도 인지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내게 가장 중요했던 항목은 목차였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을 출간 원고 쓰기에 적용한다면, 나는 '목차가 반이다'로 바꾸겠다. 목차를 완성하면 원고의 전체적인 내용이 이미 머릿속에서 정리됐다는 뜻이니까. 나머지 반은 두루뭉술한 생각을 눈에 보이는 활자로 옮기는 초고 작업과, 끝없는 교정·교열·윤문의 굴레가 되겠다. 본문을 몇 장으로 구성하고 각 장에는 어떤 글을 쓸지, 들어가는 말과 나가는 말은 무엇으로 채울지 고민했다. 그리고, 실제 목차를 작성하듯 제목까지 붙이고 간략한 줄거리까지 더했다. 글 제목과 순서는 나중에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므로, 브레인스토밍 하는 기분으로 써나갔다.


새 목차에 맞춘 샘플 원고도 두 편 작성했다.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심사에서는 브런치북이 샘플 원고 역할을 한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원고를 쓰기 전에, 바뀐 구성에 따른 새로운 글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한 편은 브런치북에 실린 글을 수정했고, 다른 한 편은 기존에 공개하지 않았던 에피소드로 채웠다. 브런치에서 글을 쓸 때는 하루에 두 편도 너끈했는데, 출간될 글이라고 생각하니 부담감에 진도가 나가지 않아 꼬박 2주가 걸렸다. 글 한 편당 글자 수가 훨씬 많은 탓도 있지만, 문장 하나, 단어 하나 고르는 데도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월급이라는 안락함에 취해 글쓰기에 모든 것을 걸지도 못하는 주제에, 신선하고 감미로운 표현이 술술 나오기 바라는 건 욕심이다. 그런데도 필력에 비해 이상만 높아서, 손끝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이 배설될 때마다 자괴감에 빠졌다. 민음사 편집부에는 하루에도 수십, 혹은 수백 편의 출간 기획서와 원고가 쏟아질 텐데, 내 글이 얼마나 어설퍼 보일까. 편집자 선생님들이 예의 그 고상한 목소리로 '선생님, 이런 글은 출판할 수 없어요'라거나 '선생님, 실망이에요'라고 말씀하시는 끔찍한 상상이 펼쳐졌다.


떨리는 마음으로 완성된 출간 기획서와 샘플 원고를 편집자님께 보냈다. 다행히 내 망상과는 달리 답장은 무척 다정했다. 편집자님께서는 '두 편 다 재미있게 잘 읽었다'라는 말과 함께 세심한 피드백을 덧붙여 주셨다. 수정할 부분은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통과였다.


답변을 확인하고 초고를 쓰기 시작한 날은 12월 20일. 마감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두 달 반이었다.


※ 감사하게도 샘플 원고 중 한 편이 민음사TV 동영상에 소개됐습니다. 제 책 이야기는 18분부터 나옵니다.





대표 이미지: Photo by Jukan Tateis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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