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 느꼈던 불안과 슬픔은 대부분 인간관계에서 기인했다. 주변 사람들보다 약간 비관적이고 예민한 성향을 타고나서인지, 어떤 관계에서도 안정된 만족감을 잘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춘기 한가운데에 부모님과 살던 집은 늘 손님으로 북적이는 사랑채 같았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모르는 아저씨가 식탁에 앉아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기도 했다. 일부러 방 문을 꼭 닫고 집을 나서도 돌아오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환히 열려 있기 일쑤였다. 집이 편하지 않으니 그다지 있고 싶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부모님과의 관계도 원만하게만은 흘러가지 않았다. '우리가 남이가'라고 외치는 환경 속에서 나는 홀로 '내가 아니면 다 남 아닌가'라고 되묻는 돌연변이였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결코 이해받지 못할 거란 서러움은 깊이 각인되었다.
다행히 교우 관계는 나쁘지 않아 어느 학교에서든 자연스레 어울리는 무리가 생기곤 했다. 그러나 '베프'나 '단짝'이라 부를 만한 일대일 관계는 한 번도 갖지 못했다. 감정 처리에 서툰 나머지, 때로는 호감이 질투로 변질되고, 동경이 실망으로 귀결되며, 끈끈함이 족쇄처럼 느껴지는 섬세한 우정의 세계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공기가 잠시 냉각되는 1초의 시간이나 가시가 느껴지는 듯한 말 한마디에 촉수가 곤두서는 것도 버거웠다. 여기에 갈등의 씨앗이 보이면 그만 관계를 놓고 싶어지는 회피적인 성향과 잦은 전학 탓에 늘 이별을 염두에 두던 습관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함께하는 괴로움보다 혼자인 고독함을 선호하는 사람'이라 포장하고 싶지만, 사실 인간관계에서 쉽게 불편함을 느끼고, 그 불편함을 잘 소화하지 못할 뿐이다. 서른을 훌쩍 넘긴 지금도 새로운 사람을 사귀거나 인맥을 넓히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 회사에서 거의 혼자 점심을 먹고, 회식에도 잘 참여하지 않는다(그래도 되는 곳이라 참 다행이다). 나서서 약속을 잡는 일도 드물다. 그런데 정말 감사하게도, 이런 내 곁에 남아 주고 드물게 새로이 다가와 주는 소수의 인연이 있다. 그 기적 같은 사람들을 챙기기에도 내가 가진 시간과 체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내 인간관계를 식습관에 비유하면, 극단적인 편식쟁이에다 겁쟁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친구와 밥을 먹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 '인간관계에 소극적인 데에 비해, 음식은 참 안 가리고 잘 먹는다'라고. 듣고 보니 그랬다. 물론 선호도의 차이는 있지만, 특별히 못 먹는 음식은 없고, 이국적인 재료나 향신료에도 거침없이 도전하는 편이다. 맛집에 가면 맛있어서 행복하고, 그저 그런 가게에 가도 '내가 만드는 것보단 낫겠지' 싶다. 음료도 마찬가지. '와인과 커피를 좋아한다'라고 하면 산지나 종류, 맛을 꼼꼼하게 따져야 할 것 같은데, 내게는 '와인이나 커피이기만 하면 웬만해선 다 좋다'라는 뜻이다. 이렇다 보니, 식음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을 보면 나의 무난함이 초라함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특히 지적이고 까칠한 매력이 넘치는 푸드 칼럼을 읽으면, '나는 이런 글은 절대 못 쓰겠지' 싶어 아쉬움이 몰려온다.
최근에도 그런 고민을 하다 ‘아무렴 어때'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미식 생활에서 쉽게 기쁨을 느끼는 자신을 부끄러워 말자고. 맞지 않는 사람들과 부딪히며 쌓인 스트레스를 번번이 음식으로 해소할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을 테니까. 폴 사무엘슨의 공식처럼 행복이 소유를 욕망으로 나눈 값이라면, 나는 욕망이 작은 덕분에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는 남들보다 훨씬 긍정적이다. 음식에 관한 글을 쓸 때 냉철하게 비평하지는 못해도, 미각에 전해진 환희를 진솔하고 생생하게 표현할 수는 있으리라.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인간관계에서 자주 절망한 이유도 내 욕심이 너무 컸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그러니까, 안정적이고 친밀한 관계에 대한 기대치가 비대한 나머지, 조금이라도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지레 겁먹는 것은 아닌가, 싶어지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개과천선해서 '인싸'가 될 가능성은 (솔직히 그럴 의지도) 없지만, 만약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쉽게 슬픔을 느끼는 쪽'과 '쉽게 기쁨을 느끼는 쪽'을 바꿔 달라고, 신께 청해보고는 싶다.
사진: Unsplash의Toa Hefti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