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다시 누린 캠퍼스의 낭만
게이오 보이(Keio Boy)라는 말이 있다. 일본 명문 사립대인 게이오기주쿠대학(이하 게이오대학)에 재학하거나 졸업한 학생을 일컫는데, 좋은 집안에서 어려움이라고는 모르고 자란 세련된 상류층 도련님 이미지다.
반면에 와세다대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을 지칭하는 ‘와세조(早稲女)’라는 말도 존재한다. 한국어로 '와세다녀'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이 단어는 귀공자 스타일에 매너 좋은 이미지의 게이오 보이와는 달리, 지방에서 갓 상경한 술 잘 마시고 드센 여학생을 일컫는다. 명문대에 다니지만 외모나 연애에 관심이 없어, 제3의 성이라는 폄하적 의도가 짙다.
왜 같은 명문 사립대학임에도 불구하고 학생에 대한 이미지가 이토록 다를까. 그 차이는 학풍에 있다. 게이오대학의 시초는 1858년 후쿠자와 유키치가 서양 문화 연구를 목적으로 설립한 란가쿠주쿠 사립학교이며, 10년 후 새로운 건물을 마련해 '게이오기주쿠'로 명명했다. 기품과 지덕을 갖춘 사회 지도자 양성을 이념으로 삼으며, 법학, 경제학, 의학, 공학이 강세다. 미타 캠퍼스, 히요시 캠퍼스, 시나노마치 캠퍼스 등 다수의 캠퍼스가 있으며 총 학생 수는 3만 명을 넘는다.
귀족적이고 부유한 이미지를 가진 게이오대학은 부속 유치원에서 초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까지 가만히 서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시스템으로 유명하다. 물론 어느 정도의 성적은 유지해야겠지만 애초에 상류층 출신만이 치열한 유치원 경쟁률을 통과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코스를 함께 통과한 인맥은 향후 취업이나 기업 경영, 정치에서도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처럼 싫든 좋은 엘리트주의의 상징이 된 게이오대학과는 달리, 와세다대학은 학문의 자유와 평등에 기인한 재야 정신과 서민적인 분위기로 잘 알려져 있다.
와세다대학의 전신은 1882년 오쿠마 시게노부가 설립한 '동경전문학교’인데, 1902년 대학교로 승격되며 '와세다 대학'이 공식 명칭이 되었다. 의학이나 이공계보다는 문학, 법학, 정치경제학이 강세이며 학문의 독립과 활용, 모범 시민의 양성을 교육 모토로 삼는다. 오쿠마 동상과 강당으로 유명한 와세다 캠퍼스 외에도 토야마 캠퍼스와 니시와세다 캠퍼스, 도코로자와 캠퍼스가 있으며, 5만 명 이상의 학생이 재학 중이다. 개방적인 학풍에 맞게 일본에서 외국인 유학생을 가장 많이 유치하는 사립대학으로, 캠퍼스에서 100개 이상 출신국의 다양한 학생을 만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을 이해하면 게이오 보이와 와세조의 차이가 조금은 이해된다. 게이오 보이가 소위 '금수저'라면, 와세조는 '개천에서 난 용'에 가까운 것이다. 특히 귀엽고 예쁘다는 뜻인 ‘카와이(可愛い)’가 여자에 대한 최고의 찬사로 통하는 일본에서, 촌스러운 외모에 자기주장이 강한 똑똑한 여성은 멸시의 대상이 되기 쉽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와세조는 사회가 강요하는 성역할에 자신을 끼워 맞추지 않고 능력으로 승부하는 존중받아 마땅한 여성이다. 부모 잘 만나 남보다 쉽게 기회를 얻은 게이오 보이보다는 스스로 기회를 개척해 내고 자신답게 사는 와세조가 더 멋지지 않은지. 지금은 와세다의 이미지가 많이 바뀌어 와세조라는 말이 잘 사용되지 않지만, 더 많은 학교, 더 많은 회사에서 이와 같은 여성이 등장하기를 바란다.
나는 2010년 가을, 빈곤한 교환학생 처지로 게이오대학에서 한 학기를 보낸 적이 있다. 하필이면 환율이 1,500원를 넘던 전설적인 엔고와 맞물린 바람에 캠퍼스 자판기에서 음료수 하나 사 먹기도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돈을 아끼려고 무작정 굶어서였는지, 아니면 홍콩에서 온 터라 도쿄의 겨울이 너무 추웠었는지, 급기야 스물한 살의 나이에 안면 마비가 와 한국에 돌아와 치료를 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친절한 교직원과 고풍스러운 미타 캠퍼스, 이방인에게 호의적이었던 학생들, 그리고 (홍콩과는 달리) 청결한 기숙사 덕분에 즐겁게 교환 학기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일본 음식과 음악, 드라마에 빠져 그 후로도 계속 도쿄에 대한 향수를 품고 지냈다.
그로부터 5년 뒤, 퇴사를 준비하며 게이오대학이 아니라 와세다대학에 지원한 건 순전히 학과 때문이었다. 국제 커뮤니케이션 연구과(Graduate School of International Culture and Communication Studies)라는 언어학과 문화학, 번역학 등 평소 관심 있었던 여러 분야를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전공이 와세다에는 있었고, 게이오를 포함한 다른 대학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전 과정을 영어로 수학할 수 있는 학과였기 때문에 토익과 토플 점수를 준비하고, 영어로 된 논문 계획서와 학업 계획서, 자기소개서를 제출했다. 합격 통보를 받은 다음 날, 사직서를 제출하고 일본어 능력시험 1급 준비에 매달려 간신히 합격했다. 2015년 9월, 3년간의 직장 생활과 바꾼 적금 통장과 퇴직금에 의지하여 나는 도쿄행 비행기에 올랐다.
내가 다닌 국제대학원은 특히나 자유방임주의로 유명한 곳이었다. 연구실 대신 리딩 룸만이 11호관 지하에 존재하며, 도움의 손길을 뻗으면 두 팔 걷고 달려오는 교수님은 많지만 그 누구도 연구 성과를 강요하지 않았다. 취업을 목표로 하는 학생은 알아서 취업 설명회를 찾아다녔고, 박사과정을 노리는 학생 역시 논문과 함께 입시와 원서 준비에 바빴다.
그 가운데 나는 아무런 목표 없이 다시 찾아온 배움의 기회를 마음껏 즐겼다. 일본 최고 교수진으로부터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고, 다양한 나라에서 온 학생들과 토론하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내 생각을 글로써 전개하는 것이 마냥 즐거웠다. 학점이나 GPA에 욕심내지 않으니 스트레스도 없었다. 오늘은 또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글을 쓸까 기대하는 것. 자기합리화일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이 공부의 참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 시기를 치열하게 보내는 대학원생이 더 많았지만, 적어도 내게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골인 지점을 향해 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목적지 없이 산책하는 시기였다. 첫 학기에는 캘리그래피와 블로그 등 취미 생활을 탐닉하기도 했다. 소수 언어 정책에 대해 쓴 석사 논문은 시작은 창대했으나 말미에는 완성에 의의를 두게 됐다(이점은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나마 이룬 것이 있다면 일본어인데, 논문은 영어로 작성했지만 부설 어학원 수업을 2년간 꾸준히 들은 덕분에 일본어 소설과 시, 논문 등을 읽는 수준이 됐다.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었지만 1년 이상 지속한 일본어 통번역 아르바이트도 나밖에 모르는 자랑거리다.
이처럼 날라리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캠퍼스 안팎에 발굴한 명소가 몇 군데 있다. 모두 2년간의 추억이 담긴 장소인데, 와세다 캠퍼스를 방문하는 이에게 꼭 추천하고 싶다.
오쿠마 가든
도쿄에는 크고 작은 공원이 많아 봄가을이 되면 언제라도 피크닉을 즐길 수 있도록 작은 돗자리를 들고 다닐 것을 권한다. 학생은 물론 외부인들도 잔디밭을 밟기 위해 방문하는 오쿠마 가든은 작지만 캠패스의 낭만을 더하는 휴식처다. 음식이나 음료를 가지고 와서 먹을 수는 있지만, 술을 먹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된다.
개방시간 9:00~17:00(4~9월) 9:00~16:30(10~3월)
입장료 무료
Uni. Shop & Cafe 125
와세다 대학 후드티와 엽서 등 각종 굿즈를 판매하는 유니 숍 앤 카페 125. 초여름, 오쿠마 가든이 보이는 테라스에 앉아서 베이글과 커피를 먹으며 한숨 돌리기 좋다. 단, 모기에 물릴 것은 각오해야 한다. 카레라이스와 같은 제법 든든한 런치 메뉴도 있지만 맞은편에 위치한 학식에 비해 세 배가량 비싼 가격이 단점이다.
영업시간 8:30~19:30 (하절기 및 연말연시 휴무)
주소 신주쿠구 도쓰카쵸 1-104
전화 03-5291-7491(기념품점) 03-3208-7350(카페)
홈페이지 unishop-cafe125.com
Good Morning Cafe
처음 대학원에 가던 날 눈에 들어온 아기자기한 외관에 왠지 이곳을 자주 찾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피자와 파스타, 샐러드, 스테이크 등 무난한 이탈리안 요리를 제공하며 특히 평일 런치 구성이 좋다. 커피, 차, 생과일주스 등 음료도 다양해 여유로운 오후 시간 대에 방문해 책을 읽거나 리포트 썼다. 와세다 학생증을 보여주면 일부 메뉴에 한해 200엔을 할인받을 수 있었는데, 졸업한 지금은 이용할 수 없어 아쉽다.
영업시간 8:00~22:00
주소 도쿄도 신주쿠구 와세다 1-9-12
전화 03-5155-3385
홈페이지 www.gmc-waseda.com
무사시노 아부라 학회 와세다 총본점 武蔵野アブラ学会 早稲田総本店
와세다 대학생이 점심시간만 되면 줄 서서 먹는 아부라 소바 맛집. 아부라 소바는 라멘의 한 종류인데, 국물 없이 기름 소스에 비벼먹는 것이 특징이다. 언뜻 보기에는 무거울 것 같지만 일반 라멘에 비해 나트륨 함량과 칼로리가 적어 건강함을 내세운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먼저 자동판매기에서 식권을 구입한 후 줄을 서서 기다리면 된다. 가장 기본 메뉴인 600엔짜리 아부라 소바에 맛 계란을 추가할 것을 추천한다. 테이블 위의 식초와 라유를 한두 바퀴 뿌리면 더욱 새콤하고 매콤해진다.
영업시간 10:30~익일 2:00 (연중무휴)
주소 도쿄도 신주쿠구 니시와세다 1-18-12
이자카야 코바이 紅梅
한자로 홍매라고 읽는 이곳은 내 지도 교수님의 단골 이자카야다. 그 덕분에 각종 세미나 뒤풀이나 송별회로 자주 찾았는데, 점심에는 주로 덮밥을 판매하고 저녁에는 사시미, 꼬치구이와 튀김 등 다양한 일본식 술안주 메뉴를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한다. 마스터 부부가 운영하는 정감 있고 소박한 분위기에 자극적이지 않은 맛 덕분인지 방문객의 연령대가 높은 편이다.
영업시간 11:00~12:00
주소 도쿄도 신주쿠구 니시와세다 2-4-26
전화 03-3202-8565
이 글을 쓰기 위해 캠퍼스를 방문한 어느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나오는 길에 거짓말처럼 지도 교수님과 마주쳐 조만간 졸업생들과 함께 코바이에서 모일 것을 약속했다. 다시 직장인이 된 지금도 와세다 캠퍼스를 방문하면 대학원생 시절로 순간 이동한 듯한 기분이 든다. 비록 최고의 대학원은 아닐지라도, 서울의 직장생활에 지쳐 있던 내게 최적이었던 곳.
학위와 상관없이 나는 여전히 배움과 성장이 필요한 미성숙한 인간이지만, 도쿄에서의 사회생활에 도전하도록 힘을 실어준 모교에 진심으로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