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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 Dec 09. 2022

12월 8일 : 다운타운 밴쿠버

재스퍼에 가기 전, 스노우 부츠를 찾아서

옷에 가득히 붙은 고양이 털을 하나씩 떼며 일기를 적는다. 길고 흥미로운 하루였다.


긴 비행에 지친 나는 전날 저녁 9시에 까무룩 잠이 들었다. 맑은 정신으로 깨고 보니 시간이 몇 시인지 알기 어려웠다. 서울 내 집이었다면 ‘헤이 구글, 지금 몇 시야?’라고 물었겠지. 아니, 묻지 못했을 것 같다. 옆에서 과수가 자고 있었으니까. 조용히 일어나 시계를 보니 2시 20분이었다. 전자책을 꺼내서 읽었다. 그러니 잠이 더 깨는 것이었다. 노트북을 챙겨 거실에 나왔다. 기척이 느껴져서 구석을 쳐다보니 고양이가 있었다. 안도하며 글을 썼다.


그러곤 6시쯤에 다시 침대에 돌아왔다. 나의 기척에 과수가 깨어났고, 이번엔 그가 글을 쓰러 거실에 갔다. 아침을 먹으라는 말에 ’응, 갈게.‘ 희미한 대답을 하며 눈을 감았다.


다시 자고 일어나니 거의 낮 12시였다. 이토록 여유로운 하루라니. 창밖에 조용히 빗소리가 들렸다. 레인쿠버라고 했던가. 레인쿠버... 그 단어를 떠올리며 잠시 소리를 들었다.



거실에 나와보니 과수가 자고 있었다. 누가 보면 여기 집주인 같다. 배경과 그림체가 상당히 유사함...



옷 색깔도 무척 그녀답다. 저 올리브색 천은 담요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신기한 치마였다.(2단으로 분리가 되는)



테이블에 앉아 아침식사를 살폈다. 깨끗하게 빈 잔과 구워진 토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창가는 조금 쌀쌀했지만 옷을 겹쳐 입고 앉으면 그럭저럭 괜찮았다.



큰 기대 안 했는데 맛있었던 아침의 요거트. 집주인 할머니가 만들어주셨다. 나도 한국 돌아가면 이렇게 과일을 재워놓은 요거트를 만들어봐야지. 먹기도 간편하고 예뻐서 좋았다. 새삼 외국 할머니는 아침으로 외국 음식을 먹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서로의 시선으로 남긴 폴라로이드.


아침을 챙겨 먹고 밖으로 향했다. 과수는 준비를 안 한 것 같은데 보면 준비가 항상 되어있어 신기하다. 오늘의 행선지는 밴쿠버 다운타운이었다. 이 도시의 시내에 가보고 싶었다.



걷다 보니 나의 귀여운 신발에 흙이 묻었다. 조금 슬펐지만 괜찮기도 했다. 어딘가 열심히 모험했다는 뜻이니까. 젖은 낙엽에 눈에 띈다. 캐나다 국기에 있는 단풍은 보이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향하는 길. 카드를 대서 무사통과하여 들어왔는데, 결제내역을 보니 결제 실패라고 한다. 무임승차를 하게 되어 얼떨떨했지만 가벼운 행운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다운타운에 도착해 먹은 첫 번째 점심. 타코와 과카몰리 하나씩 시켰는데 5만 원이 나왔다. 이 돈으로 한국에서 멕시코 요리를 먹었다면 어마어마한 진수성찬이었겠지... 하지만 맛이 괜찮았고, 캐나다 물가니까 그러려니 했다. 참고로 캐나다 달러는 한화랑 거의 비슷하여 계산하기 쉽다.



식사를 마치고 그랜빌 아일랜드 퍼블릭 마켓으로 가는 페리를 향해 걸었다. 낯선 건물의 모양이 묘했다. 현대식이라고는 하지만 한국과는 달랐고, 유럽 느낌도 아닌 것이 뭔가 거대하고 드문드문 있었다.



잘 보면 차 위에 트리를 싣고 가는 게 보인다. 귀여운 장면이었다.



페리를 타러 왔다. 생각보다 버스처럼 가볍게 탈 수 있었다. 따로 대기 시간이 길지 않았고, 사람이 모이면 출발하는 형식이었다.



현지인처럼 입기 달인 과수. 겨울이라 해가 빨리 져서 4시면 벌써 노을이다.



그랜빌 마켓 구경. 어느 여행지든 현지의 시장을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 서양에 오면 다양한 치즈가 있어서 좋다. 재스퍼에 가면 치즈를 사서 먹어봐야지.



유난히 눈에 띄었던 크리스피 포크. 육식맨 유튜브 영상에서 봤던 건데 시장에 있어서 기뻤다. 태국 음식이라고 한다. 저녁으로 먹기 위해 간단히 포장했다. 값이 저렴하진 않았지만 양이 많았다. 가게 주인은 포장을 해주며 ‘무척 맛있다. 왜냐하면 내가 만들었으니까.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그 말이 어찌나 귀여웠는지. 그걸 당당하게 말한 것이 아니라, 조금 수줍게 말했다. 그리고 생김새도 뭔가 맛잘알같이 생겼음. 믿고 구매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인 어느 가게. 시장 사진은 어떻게 찍어도 예쁘다. 뭔가 해산물이 가득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것저것 다 있어서 좋았다.





생면을 파는 가게. 하... 뇨끼도 있었다. 이런 가게가 우리 동네에도 있으면 정말 좋겠다. 아마도 한국엔 없을 테니 구경이나 잔뜩 해야지.




그리고 오늘 구매한 핸드메이드 밤. 손과 입술, 그리고 겨드랑이에 쓸 수 있다고 한다. 다용도라는 점은 훌륭한데, 겨드랑이에 바른 후 입술에 다시 쓰긴... 좀 많이 어려울 것 같다. 원치 않는 간접 키스라니...



잼 가게에서 잼도 조금 샀다. 패키지가 무척 아름다워서 좋았다. 디자이너였던 시절엔 레퍼런스라며 온갖 각도로 사진을 남겼을 텐데 지금은 그런 거 없이 그냥 소비자로 즐긴다. 하단에 손글씨로 잼 맛을 적은 게 인상 깊었다. 나중에 참고해야지... 하고 다짐하는 것을 보니 디자이너 시절 버릇이 남아있나 보다.



해가 뉘엿 저물어갈 때, 우리는 시장을 떠나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풍경이 센과 치히로에 나오는 물 위의 외딴 정류장 같아서 좋았다.


나와서 스노우부츠를 샀는데 칼결정 쿨거래를 하느라 사진이 없다. 내일 오전에 뜯어보고 이모저모 사진을 남겨야지. 소렐을 살 생각으로 갔는데 실물을 보니 어그가 괜찮아서 어그로 샀다. 32만 원, 예상대로 비싼 가격이었다. 하지만 천연 양모에 리얼 레더로 된 제품이었기에 돈 값을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디자인이 예뻐서 한국에서 신을 수 있어 좋았다. 부츠를 신은 후 거울을 보니 다리가 한층 짧아 보였다. 어쩐지 한국에서 온 검은색 웰시코기를 보는 느낌이었다.



곧이어 맞은편에 있는 빅토리아 시크릿을 갔다. 과수는 슬립원피스와 잠옷을 샀다. 나도 잠옷 욕심이 많은데 그 덕에 이미 집에 많이서 나는 구경만 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그런가, 온갖 엄한 디자인의 속옷이 많이 있었다. 이거 말로는 설명이 안 될 것 같아 사진을 하나 첨부한다.


... 뭐랄까. 옷을 만들기 전에 잡아둔 스케치나 패턴 같은 느낌이다. 당연하지만 앞과 뒤도 열려있는 모양이다.



실루엣이 귀여운 과수. 빅토리아 시크릿에서 만족스러운 쇼핑을 마쳤다.



그러곤 늦은 티타임을 갖기 위해 카페로 향했다. 밴쿠버 카페들은 6시면 영업을 마친다. 생각보다 빨리 문을 닫아 놀라웠다. 다행히 10시까지 운영하는 가게가 있었다. 초콜릿으로 된 디저트가 유명한 곳인가 보다. 많은 이들이 저녁길에 케이크를 포장해서 돌아갔다.



우리는 서로 앉아 작은 노트를 펴서 그림을 그리고 일기를 썼다. 수채화를 하고 싶었는데 물통을 두고 온 나는, 연필로 그림을 그렸다. B와 4B가 있었는데 확실히 후자가 내 마음에 든다.



앞사람을 그려보기도 하고. 즐거운 낙서를 몇 개 남겼다. 기차에서 가볍게 채색해봐도 좋겠다.



그리고 마침 눈에 띄어서 들어가 본 애플 스토어. 한국 가격이 더 저렴했다. 쿠팡 감사합니다...



돌아오는 길 시리얼에 시선을 빼앗긴 과수. 이럴 때 정말 강아지 같다.




숙소에 돌아오니 주인집 할머니가 트리를 꾸미고 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비어있었는데 언제 이렇게 예쁘게 바뀐 거지. 할머니는 트리를 어릴 때부터 꾸며봤을 테니 익숙하게 잘하는 것이겠지. 신기했다. 내일 아침에 더 자세히 봐야겠다.



9시, 비로소 늦은 저녁 식사를 했다. 간장 계란과 튀겨진 삼겹살 구이, 그리고 밥의 조화가 적절했다. 차 대신 미지근한 물과 함께 먹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나도 만들어봐야지.


짧게 머문 밴쿠버 일정이 마무리되어간다. 내일도 오늘만큼, 어쩌면 더 많이 즐거운 하루일 것이다. 무사한 오늘이 감사했다. 사람들이 기도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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