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연 Dec 10. 2022

12월 9일 : VIA rail

여행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특히 못 자고 일어났다. 한 시간 정도 잤을까. 나머지 시간은 내내 눈만 감고 있거나, 핸드폰 화면을 뒤척였다. 시차 적응. 낮에 도착해서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짜증 나거나 피곤하지는 않았다. 몸이 깬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므로. 졸리게 지내면 언젠가 더 깊은 잠을 잘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망도 있었고.




그래도 아침은 온다. 어제는 시차 부적응으로 늦잠을 자느라 제때에 못 먹었는데 이날은 과수와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시장에서 사 온 작은 잼도 꺼내어본다. 바닐라가 들어간 자두맛 잼. 고급스러운 단맛이었다. 버터와 몹시 잘 어울렸다. 오늘은 특별히 차이 티를 마셨는데, 여행지에서 맡을 법한 향이 나서 좋았다.



어제 산 스노우부츠를 꺼내본다. 브라운과 검정이 있었지만 나는 그레이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신발은 전체적으로 양가죽 소재이고, 내피는 양털이다. 발끝까지 톡톡하게 내피가 잘 들어가 있다. 부츠가 너무 높지 않다는 점도 좋았다. 원할 경우 접힌 면을 펼쳐서 더 길게 신을 수도 있다.



오늘의 룩. 기차를 타고 재스퍼에서 내렸을 시 충분히 따뜻하기 위한 패션. 11월 일본 여행에서 사 온 귀여운 털모자를 썼다. 12만 원이나 주고 산 모자였는데 여기 물가를 보니 잘 사 온 것 같고.



오늘은 강아지 손님이 배웅을 해준다. 처음에 들어올 때는 그리 짖더니 다가가니까 순하다. 이름이 릴리라고 했나.



폴린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다정한 모습이었다. 짐이 많은 우리를 보며 택시를 불러주셨다. 택시를 부를 줄 몰라서 곤란했는데 감사했다. 세상엔 어찌나 감사한 일들이 많은지.



짐이 너무 많고, 갑자기 생리가 시작되어 예민해진 나. 씩씩거리는 표정이 뒷모습에 서려있어 웃기다. 몇 시간 정도 성격 안 좋다가 다시 돌아온다. 근데 새삼 돌아온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군. 그 모습도 전부 내 모습이니까.



인생에서 흰 아이템을 가장 많이 입은 순간

VIA rail은 캐나다 대륙을 잇는 긴 횡단 열차다. 밴쿠버에서 토론토까지 가면 4박 5일이 걸린다고 한다. 우리는 재스퍼에서 내리고, 1박 2일 동안 기차를 탄다. 장기 탑승이라는 점이 비행기 시스템과 비슷해서 미리 체크인과 수화물 처리를 해야 한다. 큰 캐리어만 덜어내도 훨씬 낫다. 무게를 쟀는데 44 킬로그램 나옴... 왜죠?



hunnybee - vancouver

기차역에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근처까지 걸어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헤비 하게 먹고 싶지 않아서 고른 브런치 가게인데 가보니까 사진보다 메뉴가 더 많았다. 과수와 나는 아보카도와 햄이 들어간 샌드위치, 그리고 메이플 시럽을 얹은 핫케이크를 시켰다.



막간을 이용하여 귀여운 척~



실내 좌석이 만석이라 바깥에서 먹었다. 나는 경량 패딩이 있어서 괜찮았지만 과수는 추웠을 것 같아 지금 생각하니 조금 미안하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야외 식사 아닐까?



여성에게 특히 좋다는 히비스커스. 밖이 추워서 차를 컵에 덜어놓으면 금방 마시기 좋은 온도가 되어 그 점은 편리했다.



주문하고 나온 음식. 겉으로는 꽤 평범하게 보이는데 하나하나 조화가 좋다. 최고의 단짠 밸런스랄까. 핫케이크는 수플레 팬케이크처럼 폭신한 식감이 돋보였고, 샌드위치는 재료들이 잘 어울려서 좋았다. 평소에 큰 군말 없이 먹는 우리인데, 이때는 둘 다 극찬을 했다. 이거라면 기차 타기 전에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모두 추천할 수 있겠어!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을 한다. 블로거가 포스팅한 해외의 음식점이 그가 맛있었다고 올린 글 때문에 평범한 장소가 의문의 맛집이 되어버리는 현상들. 이게 누군가에겐 그렇게 맛있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솔직히 자신 있다. 막 멀리서 찾아올 맛은 아닌데요, 기차 타기 전에 쓱 걸어가서 먹을 정도의 거리와 맛은 됩니다. 원래 먹은 음식점 주소를 거의 안 남기지만 굳이 남길 정도로.


Hunnybee Bruncheonette

https://maps.app.goo.gl/ZL1m8XSCwwgp8ooF8?g_st=ic




비아레일은 티켓도 예쁘다. 알 수 없는 4장의 표로 이루어져 있음. 그래도 예쁘니 됐다~



기차 내부는 사진보다는 동영상이 훨씬 잘 나와서 영상으로 기록해두었다. 위치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의자 두 개가 있고, 풍경을 볼 수 있게 큰 통창이 있다.



과수가 기차 구경 겸, 글을 쓰러 나간 사이 나는 그림을 그렸다. 배가 아팠지만 그림을 그리니 어쩐지 괜찮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 기차가 멀리 가지 않아 창밖 풍경은 평범한 도시 풍경이었다. 의자에 앉아 가깝게 보이는 나의 새 신발을 그렸다. 생각한 색감이 물감으로 잘 구현되어 좋았다. 조금 따뜻한 웜 그레이 컬러, 황톳빛을 띄고 있는 퍼의 색감까지.


원래 여행을 다닐 때 사진을 주로 찍는 타입이다. 특히 아이폰보다 후지필름 카메라로 찍는 것을 좋아하는데, 여행지에서만 얻을 수 있는 피사체와 장면이 있어서 뭔가 가볍게 담아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카메라를 고집했던 것 같다. 그림은 그보다 더 깊고 신중한 일이다. 이번 여행처럼 미술도구를 제대로 챙긴 여행이 적었는데, 이번엔 달바에서 준 미니 캐리어 덕분에 미술도구를 챙길 수 있어서 좋았다. 매일 그리지는 못하더라도 꾸준히 그리고, 써야지. 여행에서 남긴 다양한 기록물들은 훗날의 내게 소중한 위로가 된다. 이 여행기도 사실은 나를 위해 쓰는 것이다.



과수가 기차 내부 모험을 마치고 가져온 전리품. 난데없이 꿀이라니... 귀여웠다.


기차를 기다릴 때, 작지만 여러 일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내 생리가 오늘 시작된 것. 원래 굉장히 주기적은 편인데 이번에는 유래 없이 60일 만에 시작된 생리라 더 몰아서 하는 느낌이었고. 과수는 숙소에 변환 어댑터를 두고 온 것이었다. 생리로 예민해진 내 짐도 들어주고, 나의 짜증도 받아주던 그녀가 갑자기 시무룩해져서 뭔가 내가 다 미안하고 짠했다. 과수는 내가 봐온 사람 중 손에 꼽히게 긍정적인 사람이지만, 그런 그녀도 분명 살다 보면 속상한 일을 마주하곤 하겠지.


‘나는 디지털 친화적인 인간이라 충전 케이블 많아. 내 거 같이 쓰자. 재스퍼는 시골이지만 사람 사는 곳이라 거기도 어댑터는 충분히 팔 거야. 아니면 여행 내내 같이 쓰다가 캘거리에서 구입하자.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가장 쉬운 문제래!’


서로가 서로를 위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정은 사랑만큼이나 귀하다.



저녁 식사는 7시 30분으로 예약해뒀다. 생각보다 배가 빨리 고프길래 우리는 가져온 간식을 먹었다. 연어 육포와 아몬드. 둘 다 금방 허기를 달랠 수 있는 고열량 음식이라 좋았다. 연어 육포는 캐나다를 떠나기 전 누군가가 우연히 추천해줘서 챙긴 음식인데 그 누구가 누구였더라? 원의 독백의 원님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하여간 고맙고 따뜻한 조언이었다. 연어 향이 은은하게 나서 맛있는 육포였다.


양고기 스테이크. 내가 먹어본 양 중 제일 부드럽고 맛있었다

저녁 식사는 모르는 사람과 함께 합석을 할 수 있는 구조였다. 이럴 때 영어를 좀 더 유창하게 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종종 못 알아듣는 우리를 위해 친절하게 얘기해주는 앞자리 부부의 배려가 좋았다. 생각해보니 나도 외국인 친구가 얘기할 때 모른다고 하면 아무렇지도 않았네. 앞으로는 못 알아들으면 솔직하게 못 알아들었다고 말해야지.



캐나다의 로컬 와인을 마셨다. 바디감이 풍부했다.



귀여운 당근 치즈 케이크와 초코 케이크로 마무리.



유튜브 영상을 찍는 나를 흥미롭게 바라본 부부. 우리가 얼마나 신세대처럼 느껴졌을까... 신세대 맞아요~!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니 좌석이 침대로 세팅되어 있었다. 직방 사진처럼 초광각 화면으로 찍어봄. 생각보다 침대가 정말 편하고, 이불은 부드럽다. 참고로 VIA rail은 흔들림이 정말 적은 편이다. 내가 이렇게 글씨를 적을 수 있을 정도.





어제와 엊그제도 여행이었지만, 우리가 꿈에 그리던 대자연에 가니 이제야 여행이 실감 난다. 창밖은 내내 어두웠다. 온통 흰 풍경일 아침을 기대하며 침대에 일찍 누웠다.



비밀을 하나 말하자면, 이 글은 자고 일어난 3시에 일어나서 쓰는 글. 하지만 9시 30분에 잠들었으므로 충분히 자둔 덕에 기분이 좋다. 창밖이 환하면 어떤 기분일까? 재스퍼는 얼마나 추울까? 기차 침대가 너무도 편안해서, 도착하지 않았으면 하면서도 아침이 기다려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