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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 Dec 11. 2022

12월 10일 : 기차여행 마무리, 그리고 재스퍼

소중한 것을 소중히 하는 마음

어제는 과수와 와인을 한 병 마셨고, 배부름과 술에 취해 일찍 잠들었다. 아마도 9시 30분이었나. 보통 시골 할머니가 이 시간에 잠들 것이다. 그러고는 4시쯤 일어나겠지. 나는 시차 부적응자라 1시에 일어났다. 몸은 멀끔하고 정신은 맑다. 이럴 때 전자기기가 도움이 안 되는 걸 알지만 자꾸 핸드폰을 들여다보네. 밀린 하루 일기나 쓰자, 어제처럼.



아침에 과수가 얼굴을 쓰다듬었다.


‘연아! 일어나.’


우리 엄마는 무자비하게 사람을 깨우는 편이다. 다정한 손길로 누군가가 날 깨우는 일이 내게는 퍽 낯설어서 금방 눈을 떴다. 비몽사몽 한 내게 그녀가 말했다. 너 시차 때문에 못 잔 거 아는데, 이 풍경은 꼭 봐야 할 것 같아서.




기차가 멈춰있었고, 눈앞에는 키가 큰 나무들과 푸른 눈이 쌓여있었다.


삶이란 대체 무엇일까. 소중한 것이 창에 어린줄도 모르고 잠든 나를 깨워 바라보라 하는 일일까. 기차는 세계였고, 잠시 세계가 나를 위해 멈추었다는 착각을 했다. 눈물이 날 것 같은 장면이었다. 같은 기분이었는지 과수도 창을 바라보다가 젖은 눈을 닦았다.



기차 내에서의 아침 식사는 6시 30분부터 8시 30분까지였다. 천천히 걸어 7시 40분쯤 식당칸으로 갔다. 어제와는 달리 많은 좌석들이 침대가 되어있었다. 설국열차가 이 기차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슷한 장면이 많았다.



식당칸에 도착하니 푸른 눈이 희게 변해있었다. 세상이 온통 흑백인 느낌. 내가 이토록 하얀 하늘을 사랑했었나. 시선이 자꾸 창에 머문다.



귀엽게 쌓여있던 각종 잼과 꿀. 궁금해서 곰돌이가 그려진 땅콩 스프레드도 먹어보았다. 아는 맛. 맛있는 맛.


사랑하는 사람과 기차여행을 해도 좋겠다. 아까 연애운을 봤는데 나는 늦게 결혼하거나 독신으로 산다고 한다. 결혼 상대는 학력, 능력, 다 따져서 찾는다고. 내가 그거 둘 다 따지는 거 운세 어플은 어찌 알았나. 사소한 거 일일이 다 따지는 피곤한 나를 누군가가 사랑해주고, 나는 그를 사랑하여 우리가 이 기차 여행을 다시 올까.


원하는 게 많다는 뜻. 한 글자도 틀린 말이 없다.




오늘 드디어 긴가민가한 생각에 확신을 했다. 과수는 예쁜 사람이다! 이 글을 읽을 과수는 ‘예? 갑자기요?’ 하면서도, 조금은 느릿한 아이니까 몇 초 뒤에 ‘근데 그게 긴가민가했다고요?’ 할 수 있겠다. 겉보기엔 수수하고 자연스럽게 하고 다녀서 그 예쁨이 단번에 티 나지 않는다. 근데 며칠 가깝게 붙어지내다보니 보면 볼수록 예쁘다는 생각이 든다. 꼭 외모가 아니라 그 아이를 설명하는 많은 것들이 그렇다. 그래서 자주 사진을 찍게 된다. 예쁜 사람과 여행 올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다.





내가 찍은 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 빽빽한 숲과 너른 여백이 대조를 이룬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랑하는 친구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차 밖 풍경이 아름다울수록 시간이 금방 간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1박 2일인데 내가 타본 그 어떤 기차보다도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드게임 테이블에서 각자 일기를 쓴 우리.

창작이 주는 고요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와 여행을 와서 기쁘다. 과수는 글을 쓰러 자주 숨는다. 나는 과수의 도망이 좋다. 이전에 본 책에서 마음에 들었던 문장이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글이었다.


나는 뒷마당을 파헤치는 개와 같이 구석에서 무언가를 찾고, 발견한다. 나의 창작이란 그렇게 남몰래 숨어서 무언가를 하는 일이다. 시간이 지나면 내가 찾은 것을 입에 물고, 코와 손에 흙을 묻힌 채 수줍게 돌아온다.


과수가 자리를 비운다면 어딘가에서 무엇을 찾고, 발견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도 그녀가 떠난 자리에서 몰래 삽질을 시작한다. 지금처럼 그녀가 자는 시간에 말이다.



아쉽지만 도착했다. 좋은 일도 이렇게 끝이 있으니, 슬픈 일도 이렇게 종착역이 있지 않을까? 이 기차의 속도처럼 느려도 빠른 기분으로 지나갔으면.




걸어서 숙소에 도착했다. 다행인 건 우리 둘 다 길을 잘 찾는다는 것이다. 나는 지도를 잘 보고, 과수는 건물을 잘 기억한다. 우리의 머리를 합친 다중지능 지도를 상상해본다. 둘 다 여행을 자주 다녀온 편이라 수월하게 해내는 것들이 많은데, 그럼에도 나름의 좌충우돌이 생긴다. 이번 여행에서 느낀 점은 과수와 나의 생각의 속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캐나다에 와서 여러 시차 적응을 한다. 그중 생각의 시차를 상상한다.  나는 무엇이든 빠르게 결정하고, 과수는 천천히 고민한다. 이 글을 읽을 과수에게 내가 어떻게 빠르게 결정하게 되었는지 말해주고 싶다.


내 머리에는 늘 생각의 파도가 친다. 그래서 다음 파도가 덮치면 다시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개껍질을 발견하면 얼른 줍는다. 어쩌면 크로키와 비슷하다. 빨리 해야 더 정확해지는 일들. 밀려오는 생각을 피하고 싶어서, 동시에 정확하고 싶어서 빠름을 취하는 나 같은 인간이 있다. 그리고 고백 하자면 그냥 성격이 급하기도 해.


동시에 내 생각과 삶의 속도에 숨이 차다는 생각도 한다. 그래서 당분간의 내 목표는 잠시 멈추는 것이다. 빨리 자라는 나무는 높게 자라거나 두꺼울 수 있지만 나이테가 성기다. 나의 나무테를 촘촘함으로 채우고 싶다. 그러려고 글을 쓰는 것 같다. 내게 글은 생각을 느리게 짚어가는 일이니까.






옷 색의 조합이 마음에 든다. 재스퍼 시내는 굉장히 작고 아기자기한 편이다. 등산용품점에 아크테릭스가 가득이라 좋다. 한국에서 특히 엄청 비싸던데 여기서는 10만 원 정도 더 싸다. 여행지에서 그 나라 브랜드 제품을 사는 것을 좋아한다.



주먹만큼 큰 페레로로쉐. 나는 이런 거 잘 도전하지 못한다. 나보다 디저트가 세 보이는 느낌... 엄청나게 단 음식에 약하다. 그런 것을 잘 먹는 사람이 귀여우면서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재스퍼의 기념품 가게. 여기에 충전기와 충전선이 팔 거라 누가 생각했을까! 귀여운 마그넷을 하나 사 왔다. 사장님의 니트가 너무 귀엽다... 재스퍼 너드미.



저녁은 간단하게, 마트에서 사 온 구운 닭을 먹었다. 그리고 와인 가게에서 추천받은 캐나다 와인을 샀는데 돌이켜보니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먹는 와인보다 더 맛있었다, 흑흑. 신기하게 캐나다 음식이 입에 잘 맞는다. 엄청 대단한 무언가는 없는데, 간이 괜찮다고 해야 할까. 저 닭도 짜게 생겨서는 별로 안 짜서 놀랐다.



밴쿠버에서 재스퍼까지 오니 시차가 또 생겼다. 여기서도 일찍 깬다. 과수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슬퍼하지 말아야지. 슬퍼함을 슬퍼하지도 말아야지. 아니, 때로는 기꺼이 슬퍼해야지. 그 모든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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