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많이 피곤했나 보다. 다들 오래 잠을 자서 나만 일찍 나왔다. 세비야의 첫인상은 '스페인 속 한국'이었을 정도로 한국인이 많았는데, 오전에 나오니 바쁜 출근길의 현지 사람들을 마주한다. 숙소 밖 선선한 공기에 섞인 꽃향기가 대단하다. 앉아있는 지금도 정원의 꽃냄새가 난다. 나도 이런 향기를 맡으며 걸었던 길들이 있는데.
오늘내일 비가 온다고 한다. 론다를 가야 할까?
아침을 먹고 싶어. 트립 어드바이저를 찾는데 온통 정찬만 나온다. 으, 그런 건 이제 지겨워. 아무거나 먹을 테다. 일단 사람이 많아 보이는 가게에 들어왔다. 어떡하지? 하고 가만히 있었다. 멍하니 있으니 도와주는구나, 친절한 세비야 사람들. 나름 빵도 고르고 음료와 소스도 골랐다. 햄이 설마 안 나오나? 안돼..
결론부터 말하자면 햄 없이도 엄청 맛있었다. 그간 기억 안 나는 며칠간의 조식, 전부 보상하는 맛이다. 마음에 드는 점은 간소한 재료로 된 심플한 구성. 빵, 토마토소스, 올리브 오일, 직접 짠 오렌지 주스. 이게 끝이다. 근데 정말 맛있다. 신기할 정도로. 한입 베어 물고 눈이 커졌다. 카운터의 언니랑 눈이 마주쳐 나도 모르게 엄지를 들었다.
내일부터 계속 이렇게 스페인식 아침 식사를 할 생각을 하니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사실 오늘 숙소를 나설 때 도망친다는 기분으로 나왔다. 그 며칠 너무할 정도로 운도, 날씨도 좋았던 내가 좋지 않은 숙소와 흐린 날의 세비야를 앞두니 미리 실망했었나 보다.(TOC 호스텔은 지문인식 열쇠를 쓴다는 점 빼고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와이파이는 가히 끔찍하다.) 오늘은 무얼 할까? 아무 카페나 가서 그림을 그리고 오후엔 대성당 들르고, 그러면 하루가 또 다 지나겠다. 아이스크림도 먹어야지. 두 번 먹어야지. 옆에 학생 무리가 지나간다. 얘들아, 어서 돈 벌어. 그리고 퇴사해. 백수는 좋은 거야.
다리가 아프다. 이런 날엔 어제를 되돌아봐야 한다. 맙소사 15킬로를 걸었다고? 환장할 노릇이다.
가게에 들어왔다. 어디든 카페에 갈 요량이었으나 마땅한 곳을 찾기 힘들었다. 지도에서 가장 가까운 음식점을 찾는다. 한국어 메뉴가 있다고? 근데 엄청 맛있다고?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현지인은 안 가고 관광객만 가는 가게인데(명동 이삭토스트 같은) 이곳은 너무 피곤하고 가까워서 안 올 수 없었다. 메뉴는 타파스로 4가지. 너무 많아서 고민이었는데 직원이 추천해주는 메뉴 2가지로 결정을 마무리했다. 기대되네. 맛있대. 오징어 튀김이 그렇게 좋대. 듣던 음식은 다 맛보게 되는구나. 새우와 조개가 남았어.
너무 맛있다. 인생 00이라는 말 붙이는 거 별로 내키지 않는데 이 정도면 인생 튀김이다. 겉은 바삭하고 안은 부드럽다. 환상의 튀김.
저녁. 나란 인간의 지독한 기질이 이젠 귀엽다. 친구랑 있었으면 '더 갈래? 아무 데나 들어갈래?'라고 물어봤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내 대답은 '피곤하지만 아무 데나 갈 바에야 더 가볼래.'이기에, 다리는 혹사되는 수밖에 없다.
의식적으로 음악의 볼륨을 높이고 걸음의 속도는 늦췄다. 조금 더 마음이 넓고 여유로운 내가 되고 싶다. 그러고 싶어서 온 여행이었는데 나는 왜 조급해하고 있었을까.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날씨, 굳게 닫힌 문은 전부 내가 더 쉬어가라는 뜻이다.
아주 사소한 순간. 나는 시가렛 애프터 섹스의 스위트를 듣고 있었다. 비가 와서 크록스를 신었는데 바닥이 너무 미끄러워서 살금살금 걷다, 그냥 스케이트 타듯 발을 질질 끌었다. 찍고 싶은 야경이 있어 잠시 멈췄다가, 나를 위해 멈춰준 행인들을 위해 빠른 걸음으로 돌아서다 물 웅덩이를 밟았다. '악!' 이어폰을 낀 나만 못 들은 비명이었다. 다시 스케이트를 탄다. 예술가인지 거지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끄덕였다. 우린 어떤 인사를 한 것이다. 비가 많이 온, 즐거운 미완의 하루였다.
내가 맞은 비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얼마나 많은 비와 해를 받아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