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다를 가려고 했는데 종일 비 소식에 포기했다. 아니 그냥 갈까? 휴.
짜증이 너무 심하게 나서 주체할 수 없다. 하필 날씨는 이렇게 흐리며, 룸메이트 아저씨 화장실 소리는 적나라하고, 방은 왜 이렇게 더운 거야? 론다에 간다. 아무런 기대 없이 간다.
론다에 가지 않는다. 아무런 기대 없이 나설 날씨가 아니다. 오늘은 힘든 날. 한껏 쉬어보기로 한다.
잠을 많이 잤다. 아침을 먹고 돌아와 12시까지 내리 자버렸다. 세비야에 와서는 하는 일이 먹는 게 전부라 왠지 속상하다. 그럼에도 어제는 다사다난하고 멋진 하루였어서, 오늘이 기대되긴 한다. 아직도 비가 지겹게 온다. 이곳의 여름이 정말 궁금하다. 덥지만 또 습하진 않아서 견딜만하다는데, 그게 대체 어떤 기분인지. 작년 여름에 간 상해는 한국 여름의 심화 버전, 죽을 맛이었다.
오늘은 맥주 대신 콜라를 먹는다. 본 메뉴와 타파 하나를 다 먹는 걸 보니 고독한 미식가 다됐어. 사실 이번 여행은 맛 기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성공만 했다. 당부처럼 듣던 '씬 쌀(소금 없이)'를 한 번도 안 썼는데 입에 잘 맞았고. 뭐지? 그리고 양이 많아졌다. (왜지?) 어젯밤에 간 타파스 바도 좋았다. 우리나라에도 타파스의 개념을 들였으면 좋겠어. 메뉴를 조금씩 작은 접시에 파는. 내가 요리를 잘하면 사업으로 할 텐데 영 소질이 없어서.
아빠와 여행할 때 아빠의 몰랐던 면모를 많이 알았고 엄마와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나의 몰랐던 점들을 아는 기분이 든다. 생각보다 많이 강박적이고 소심하며 외로움을 잘 탄다. 그리고 생각처럼 못해서 짜증내는 모습이 우습고 귀엽다.
이 도시가 왜 좋다는지 모르겠어.. 한다면 날씨를 의심하면 된다. 비가 그치고 해가 떴다. 오전과 오후 가 천지차이다. 광장엔 활기가 넘치는구나. 다만 좀 목이 마르고, 해가 지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다. 이곳의 노을이 궁금하다.
보다폰 유심칩을 구입했다. 바르셀로나에서 2기가에 25유로를 줬는데 여기선 3.5기가에 20유로다. 어쩐지 서럽고 몰랐으면 행복했겠지만.. 괜찮다. 유랑에 검색해보니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어흐흑.. 핸드폰 요금은 한국이나 외국이나 골머리를 썩히는구나.
많은 쇼핑을 했다. 워낙 브랜드가 많다 보니 내 취향인 것도 여러 벌이라 고생 좀 했다. 론다도 안 가고 오늘 할 일 없어, 투정 부려놓고 7킬로를 걸었다고? 나란 녀석.. 정말 귀엽다.
광장의 노을을 보러 갈 것이다. 타코벨을 포장하고 스페인 광장에 향하는 길이다. 어쩐지 신난다.
노을. 마음이 뭉클할 정도로 좋았다. 빈 타코벨 종이가방을 덜렁덜렁 들고 다니며 밤의 세비야를 거닐었다. 사실 오늘 아침 눈을 감으며 '이젠 여기가 지긋지긋할 때도 됐어!' 라던지 '세비야는 이틀만 와도 돼.' 하며 억지로 다시 잠을 청했다. 사실 말은 그렇게 해도 여기가 싫었던 적은 없었는데. 비가 와도 뭔가 좋았으면서. 자주 만난 한국인도 반가웠고. 여긴 다시는 안 와, 다짐했지만 여기야말로 다시 올 것 같다. 세비야가 좋다고? 바보. 처음부터 나는 그 문장을 의심하며 왔나 보다. 그 뜻을 이제야 이해했다. 거리가 금빛으로 환하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