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4일 : 세비야, 안녕

by 이연

11시 체크아웃. 짐 다 싸기.


현금과 노트 챙기고 나머지 다 봉인.

가방 챙기고 티켓도 두 장 챙기기

살바도르 성당에서 통합권 사기.





어제 유심을 저렴하게 산 기념으로 신나게 인터넷을 했더니 너무 많이 써버렸다. 몸을 일으키긴 귀찮고 핸드폰은 하고 싶을 때 일기를 쓴다. 오늘은 세비야 마지막 날이고, 야간 버스를 타고 내일 리스본으로 간다. 그 동네는 워낙 좋다는 이야기만 들어서 더욱 기대 중이다. 트램도 타고, 에그타르트도 먹어야지. 와이파이가 잘 되면 좋겠다. 아, 오늘 이상한 꿈을 꿨다. 서울에 며칠 머물던 난 어느 숙소를 알아봐야 하지? 하고 고민을 하다 '아! 내 자취방이 있지.'하고 오래 비워뒀던 그곳에 돌아가는. 뭐 이런 꿈이 다 있어. 아무튼 그립다. 좋아하는 향과 이불과 냉장고와 노트북이 있는 그곳.





아침으로 스무디를 먹고 바로 추로스를 먹으러 갔다. 젠장, 거긴 전쟁터였어. 기빨리듯 해치우다 남은 추로스를 포장해왔다. 양도 너무 많아. 시무룩한 얼굴로 포장한 추로스를 거리에서 한 입 먹었다. 응? 완전히 다른 맛이다. 정말 너무 맛있다. 하지만 가게 안에선 도무지 맛을 느낄 수 없었다지. 옆에 동양인처럼 보이는 남자가 들어와서 제발 시키지 말고 같이 먹자고 하려 했는데, (양이 많다.) 문득 비친 핸드폰의 언어가 한국어가 아닌 것을 보고 망설이는 찰나 그도 주문을 해버렸다. 아, 그냥 영어로 같이 먹자고 할 걸. 오렌지주스는 너무나 신 맛이라 방금 죽은 오렌지의 한이 서린 것 같았다. 지금은 해 아래 앉아있다. 조용히 있고 싶어 도망친 장소인데 소녀 둘이 앉아 노래를 틀어놓고 열창한다. 귀엽기도 하지. 전엔 이해할 수 없었던 그늘이 춥다는 말, 해가 너무 강해서 생존을 위해 선글라스를 껴야 한다는 말, 다 알 것 같다. 야간 버스를 타기 전까지 12시간이 남았다. 성당 보고 플라멩코 보는 것 외에 계획이 없는데. 뭐하지? 근데 이 기름 많은 추로스는 왜 자꾸 손이 가는지.

아보카도와 우유를 갈아 만든, 아 정말 맛있었다
한국 시장 도너츠 맛!
기름기 가득! 그러니 맛이 있지




살바도르 성당에서 통합권을 구매하면 줄을 서지 않고 세비야 대성당에 들어올 수 있다. 그리고 두 개의 성당을 볼 수 있고. 살바도르 성당은 많이 작기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어마한 디테일에 놀랐다. 장식되어있는 식물의 움직임이 생생해 살아있는 듯하고, 채색되어있는 하늘 무늬 천장도 아름답다. 멀지 않은 곳에 세비야 대성당이 있다. 전부 둘러볼 수 없는 디테일이 곳곳에 상당하다. 학부시절 미술사 공부 좀 열심히 할 걸. 다시 돌아가도 그러지 않을 거지만 해보는 가벼운 후회.






여행 내내 유럽인들을 보고 쉬는 법을 배우는 기분이다. 앉고 싶은 강가를 발견했고, 그들을 따라 신발을 벗고 걸터앉았다. 나 원래 겁이 많아서 이런 거 절대 안 하는 성격인데. 방금 배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인사를 보냈다. 이런 건 또 잘하지 내가. 오늘은 별로 계획이 없는 하루였는데 시간이 잘 간다.





맑은 날엔 눈을 감으면 더 환하다.






눈을 감고, 이 장면을 어떤 색으로 부를지 고민한다. 흰색, 오렌지색, 검은색. 눈꺼풀은 커튼이 된다.





여행을 하면 문득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먼 배경음처럼 들리며 나는 이 순간을 영영 못 잊겠구나, 하는 기분이 든다. 너른 강을 발 밑에 두고 있는 지금이 그렇다.






샤프란, '냉장고를 부탁해'에 나오면 모두들 감탄하는 고급 식재료. 슈퍼에서 1.78유로로 팔고 있었다.(약 2400원) 이걸 내가 사서 무얼 할 수 있을까. 나름 신중히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빠에야의 중요한 재료라고? 차로도 마실 수 있다고? 그래.. 일단 사고 보자.


빠에야를 부탁해





플라멩코 박물관을 찾다 세비야 미술관을 발견했다. 1.5유로라고? 그림이 좋다고? 시간이 애매한 5시 30분, 공연은 7시. 음.. 좀 무리하기로 했다.


꼭 들르시길. 멋진 그림이 많습니다





세비야 마지막 날은 또 예상하지 못한 일로 바빴다. 그림을 그렇게 오래 보고 올 줄이야. 공연에 늦을 것 같아 뛰어왔다. 숨이 차지만, 아아. 진짜 좋았어. 옛 세비야 거리 광장을 보는 것도, 아름다운 여인의 초상도, 검은 예수 그림도. 오늘은 다리를 건너고 예상하지 못한 곳을 거닐며 진짜 여행을 했다. 내가 바라던 게 이거야. 관광 아니고 여행. 마음이 있다면 방 안에서도 가능한 게 여행이라 믿는다. 멋진 하루였어.






내심 저녁은 굶거나 간소하게 먹을 생각이었으나 너무 뛰어다닌 탓에 뭐라도 좀 제대로 먹어야겠다. 타파스 3개를 여자 둘이 나눠먹었다는 후기를 보고 좀 머쓱했던 나. 나는 혼자 4개 먹고 술도 2잔 먹었는데. 고로상처럼 고독한 대식가가 되어버렸다. 타파스 2개와 술 한 잔 마셔야지. 많이 줄인 것이다.





플라멩코 공연, 문득 출국 전에 인천공항에서 봤던 탈춤과 사자춤이 생각났다. 그 나라의 문화를 알고 싶으면 전통 춤과 노래를 들으면 되겠구나, 싶었다. 뭐라 형용할 수는 없지만 이게 바로 스페인, 그리고 세비야의 정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단출한 인원 구성으로 꽉 찬 무대를 보여준다. 직전에 봤던 세비야 미술관의 그림이 좋은 참고가 되었다. 광장에서, 아름다운 무희가 화려한 옷을 입고 정열을 춤추는, 힘든 삶을 예술로 승화하는 서민의 모습이 생각났다. 구두 소리와 표정, 그리고 노래하는 사람과 기타까지 빠짐없이 꽉 찬 무대를 만들었다. 좋은 세비야 여행의 마무리였다. 지금은 타코벨에서 저녁을 먹고 버스 시간을 기다리는 중. 벌써 9시 17분이라니, 2시간 후면 이 도시를 떠난다. 오래 머문 만큼 반가웠고 그리울 세비야. 많이 생각 날 것 같다. 아아. 아까 짐을 맡기던 짐칸 문 앞에 바퀴벌레가 죽어 있었는데 기적적으로 누가 좀 치워줬으면. 어쩐지 그게 두려워 자꾸 타코벨에 머무는 것 같기도 하다.


공연장은 촬영이 불가하여, 낮에 본 플라멩코 사진을 올립니다
저녁은 타코벨을 먹었다





바퀴벌레는 산산조각 나 있었다. 치워주길 바란 거지 능지처참한 모습을 목격하고 싶진 않았어요.. 서둘러 역으로 간다.






버스정류장과 세비야 광장이 가깝다. 어제는 야경을 보려다가 도중에 쫓겨났다. 아. 세비야에 4일 지내면서 완전한 광장 야경을 못 보는 것은 좀 아쉬운데. 캐리어를 끌고 향했다. 내 몸은 주인을 잘못 만나 고생만 한다.


그래도 좋은 구경도 많이 하니까 봐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