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5일 : 리스본행 야간 버스

by 이연

야간 버스에 탑승했다. 생각보다 편안하고 넓다. 야심 차게 목베개를 꺼내 두었다. 같은 여정인 한국 사람들을 만나 오래간만에 한국어로 마음껏 떠들었다. 세비야는 오늘부터 축제가 벌어진다고 한다. 어쩐지 멋지게 입은 사람이 많았어. 맑은 날씨와 축제를 뒤로하고 리스본으로 간다. 나의 첫 야간 버스다.






인연이란 기묘하다. 4년 전 유럽여행과 달리 이번엔 좀처럼 동행을 만나기 쉽지 않았다. 그새 설마 세상이 각박해진 걸까? 그럴 리 없지. 나 빼고 다들 동행 구해서 하하호호 밥을 먹는 걸 봐. 뭐 나름 혼자서도 즐거웠기에 애써 구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도 누군가를 만나 서로의 여정에 대해 나누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 낮에 스페인 광장에서 만났던 분을 광장에서 다시 만났다. 같은 이유였다. 떠나기 전날 스페인 광장의 야경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낮에 만났던 순간도 돌이켜보면 재미있다. 분수대 근처를 서성이는데 마침 햇살 때문에 무지개가 생겨서 '앗!'이라고 생각한 순간, 비슷한 표정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슬램덩크의 유명한 그 장면처럼, 한 순간에 뜻을 교환한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카메라를 건네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리고 쿨하게 제 갈길을 갔지.



그런 우리가 다음 날 저녁에 다시 만난 것이다. 마침 같은 버스를 타고. 두 번의 만남이면 반가워해도 된다. 우리는 사람들이 다리에서 사진 찍는 거 너무 부러웠다고, 한적한 광장에서 마음껏 사진을 찍었다.




터미널에 오니 다른 한국인 분을 또 만나 셋이 이야기를 나눴다. 그분은 오늘이 생일이라고, 한 시간 남았는데 아파서 너무 슬펐다고 말했다. 짧게 남았지만 한 번뿐일 세비야에서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드렸다. 그리고 포르투에서 만나자며 약속도 잡았다. 그러는 동안 버스는 생각보다 늦게 왔다. 그래도 기다리는 시간은 불안하거나 외롭지 않았다. 그냥 좀 늦는 거겠지 뭐, 나는 그라나다행 비행기를 타고 말라가에서도 내려봤는걸. 15분 뒤 버스가 왔다. 스페인은 잠시 안녕이다. 마드리드에서 만나.





지금은 지하철. 다음 역에서 내린다. 아, 야간 버스. 이렇게 미칠 듯 피곤한 교통이었구나. 자기만 하는 나도 힘든데 운전하시는 분은 얼마나 피곤할까. 잠을 자긴 했는데 아주 얇은 램수면으로 밤을 꼬박 지새웠다. 시간이 빨리 가긴 했어. 하지만 일어나자마자 허리가 뜨악 아팠달까. 나름 맨 뒷자리에 앉아 두 다리를 뻗고 잤는데도 그렇다. 흠. 어떡하지? 숙소에 도착하면 너무 이른 아침인데. 사실 이렇게 피곤한 여정이 하나 더 남았다. 라이언에어 공항 노숙. 그건 진짜 어떡하지? 하..


그래도 지하철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다행히 숙소는 멀지 않았고 조식도 먹을 수 있게 해줬다. 다만 두시까지 뭐하지? 맑은 세비야를 떠나 흐린 리스본에 도착한 나.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다. 한국인뿐이던 세비야를 떠나니 여긴 외국인뿐이다. 뭐지, 이 숙소? 완전 프랑스다. 불어가 곳곳에서 들려.





사실 어제 플라멩코 공연을 보며 저녁 메뉴에 대해 열렬히 생각한 것은 비밀이다. 생각지도 않게 먹은 타코벨은 너무나 성공적이었다.





코가 이상해. 감기에 걸린 기분이다. 제발. 기분만 그랬으면.





2시, 체크인 시간을 기다렸다가 낮잠을 좀 자고 움직여야겠다. 야간 버스를 타서 아낀 건 시간이 아니라 그저 숙박비라니까. 게임으로 치면 체력이 빨간색으로 간당간당한 상태다. 뼈 마디가 다 아프네. 약간 툴툴댔다. 엄마는 힘든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래, 여행이잖아. 엄마는 늘 맞는 말만 해.





숙소 로비에서 자고 일어났다. 나는 피곤해봤자 낮잠이 12시를 넘기지 않는 인간. 2시 체크인을 위해 점심식사 겸 밖에 나서기로 했다. 일요일. 가게가 다 닫는구나. 이럴 땐 좀 서글프다. 외국에선 이게 당연한데 한국에선 그게 아니다. 언제나 여는 한국이 좋아!라고 하면 너무 어리광인가. 아무튼 한 번 허탕 치고 무작정 연 가게로 왔는데 너무 고급스럽다. 아아. 포르투갈 물가 싸다며. 여긴 그럴 곳이 아니다. 바르셀로나 물가로 양고기를 시켰다.(그렇다고 시시하게 먹을 내가 아니지) The Fork 앱으로 예약하면 30% 할인이 된다고 한다. 그것만 믿으며. 아아. 돈 주고 산 물이라 그런지 자꾸 따라주신다. 방금도. 몸 둘 바를 모르겠어. 가뜩이나 야간 버스로 누추한 모습이라 편하라고 해주는 배려가 더 불편하다. 음.. 앞에 있는 빵을 먹으면 2.5유로가 붙는다. 고민 중이다. 아아. 먹자. 든든히 먹고 걷자. 아니야. 양고기 나오는 걸 보고 판단하자. 좀 소심하면 어때, 이건 신중한 거라고.


결국 먹었다.





내가 머무는 숙소가 명품 거리 근처에 있고, 그러니 그런 고급 레스토랑이 있는 게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너무 쉬운 추론인데. 결국 혼자서 23유로가 나왔다. 물가가 싼 포르투갈에서의 첫 끼니 가격으로 아쉽다. 근데 나오니 뭔가 흰 천막이 주르륵. 설마 그건가? 내가 좋아하는 그거. 시장! 시장이었다. 귀여운 코르크 공예품과 에코백, 엽서, 골동품들이 있었다. 아아. 물가가 싸다는 게 이거구나. 사장님 이건요, 돈을 더 받아야 해요. 귀여운 동전 지갑을 하나 샀다. 가볍고 수납이 좋다.


귀엽다. 새가 옹기종기
코르크 제품이 많다. 일요일 리스본에 간다면 꼭 들르시길
정말 귀엽지 않아요? 7유로




빠흐뿌아. 이름도 생소한 이 브랜드와 사랑에 빠졌다. 액세서리 전문점인데 가방을 잘 만든다. 시계도, 와.. 스페인에서 내내 참으며 포르투갈 가면 사야지, 했는데 매장도 많고 종류도 다양하다. 가방을 샀다. 멋스럽고 가벼워서 마음에 든다. 다만 호스텔의 이불 상태가 오늘의 걸림돌이다. 흰 얼룩을 발견했다. 최소한의 빨래도 하지 않는 것이지. 바꿔 받은 이불도 그리 깨끗하진 않다. 아, 이런 곳에 말로만 듣던 배드 버그가 있는 걸까. (숙소의 이름은 NLC hostel입니다. 나는 여길 추천하지 않습니다.)


가방 25.99 유로, parfois





물을 좀 사려고 슈퍼를 왔는데 진심 전쟁이 난 줄 알았다. 물건이 하나도 없어.. 심지어 물도 없다. 왜 이렇게 된 거냐니까 리모델링을 한단다. 근처 다른 슈퍼를 물어서 간신히 물 한 병을 사 왔다. 오늘은 이걸로 충분해. 이제 좀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