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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버트 Feb 15. 2016

트립 투 뉴욕 얼론 - 15

Day7 뮤지컬 The book of Mormon을 보다

Day7 뮤지컬 The book of Mormon을 보다. 그리고 마지막 밤.






다시 이 시리즈의 첫날 첫 글로 돌아가 보자.


5일의 포상휴가를 손에 쥐게 되었을 때 나의 첫 희망 여행지는 방콕이었다. 

달고 고소하고 느끼하고 따뜻한 방콕에 가서, 남들은 쌀쌀해지는 날씨에 혼자 비키니도 좀 입어보고 호화롭게 마사지도 받아보고 싶었다. 딴에는 1년 반 동안 일하며 쌓아왔다고 투덜거렸던 스트레스라는 것을 마음껏 풀고 싶었더랬다.

그런데 방콕 비행기까지 다 예매한 마당에 방콕 시내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했다. 방콕으로 향하는 비행기표를 예매한 수많은 한국인들은 각종 커뮤니티에서 이 시기에 방콕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자신을 세계여행의 전문가라고 소개한 한 네티즌은 '원래 여행지는 테러 났을 때가 가장 안전해요, 그때는 경비가 삼엄해서 테러리스트들이 쉽사리 행동하지 못하거든요'라며 확신에 가득 찬 글을 썼다. 아, 그럼 됐다. 나는 안심하고 방콕 방문 계획을 훑었다.

그런데 다음날 또 폭탄 테러가 터졌다. 이번에는 내가 묵으려고 했던 사촌오빠의 아파트 근처였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방콕으로 향하는 비행기표를 취소했다. 3년 전 테러로 인해 취소되었던 방콕 여행에 이어 두 번째다. 어쩌면 방콕에 가겠다는 말 자체를 꺼내면 안 되는 사람인가 싶었다. 포상휴가는 제주도로 가볼까, 나는 가까운 여행지를 뒤적이고 있었다.


사실 나는 여행에 썩 특화된 사람이 아니다. 건강한 이들에 비해 체력이 약해 쉽사리 골골대기 일쑤인 데다가 맘먹고 돌아다니기보다는 익숙한 곳에 퍼질러 앉아있는 것을 더 선호한다. 새로운 음식점보다는 늘 가던 단골 음식점을 더 자주 방문하는 편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보다 원래 만나던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훨씬 즐겁다. 겁이 많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서 서울에서도 밤늦게는 웬만하면 혼자 걷지 않는다. 남들이 다 본 영화, 남들이 다 본 드라마도 접하지 못한 것이 많아 파리, 로마, 프라하, 뉴욕 같은 세계적인 관광도시에 품는 환상도 얕았다.

그런 내가 홀연히 뉴욕행을 결정했던 이유는, 갑자기 '그래 뉴욕이다'라고 생각한 이유는 바로 이 동영상에 등장하는 뮤지컬 때문이다.


일 년에 한 번씩 개최되는 토니 어워즈는 일 년에 적어도 대여섯 번은 돌려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콘텐츠이다. 그중에서도 2011년 최고의 뮤지컬 상을 수상한 <The book fo Mormon, 몰몬의 책>은,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개최되는 공연들 중 그 어떤 것보다도 한국에서의 공연이 멀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여행지를 정할 때, 이왕 방콕에 가서 쉽게 노는 것이 무산된 김에 한국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을 해보자는 강한 열망이 일었다. 그 열망의 끝에 닿아있는 것이 바로 이 뮤지컬이었다.



https://youtu.be/sZIFqaqKoBI




사우스 파크의 제작진이 전반적인 프로듀싱을, 겨울왕국의 음악감독이 총음악을 담당한 이 뮤지컬은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자마자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4~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뉴욕의 가장 핫한 뮤지컬 중 하나이다. 나 역시 이 공연을 OST 앨범, 토니 어워즈의 영상으로 접했을 때의 즐거운 충격을 잊지 못한다. 다만 이 재치 넘치는 뮤지컬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으로의 수입 또는 내한공연이 한동안 이루어지지 않거나 어쩌면 평생, 아예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뮤지컬을 보기 전에도 그렇고 보고 나서는 더더욱)

이유는 많다. 뮤지컬 주인공들이 우리나라에서 유독 이질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몰몬교 도라는 점, 이 뮤지컬이 몰몬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를 풍자하고 비판하며 결국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기까지 이른다는 점 등등. 무엇보다 극 전반을 꿰뚫고 있는 유머와 욕설, 칼날 같은 묘사가 3시간 내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데 이 대사가 전부 미국의 역사나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에, 과연 한국에서 번역된다 해도 이 뮤지컬이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에 대해 확신이 서지를 않았던 것이다.


뮤지컬의 줄거리와 이에 대한 오타쿠스러운 내용은 다음에 여러 포스팅을 통해 만나보기로 하고, 온전히 <내>가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The book of Mormon, 몰몬의 책>을 관람한 이야기만 하고자 한다. 다른 더 오타쿠 같은 이야기들은 차후를 기대해주시기 바란다.




웬만한 뮤지컬들은 티켓마스터를 통해 예매했지만, 인기로 따지면 뮤지컬계의 아이언맨이나 다름없는 <몰몬의 책>은 그 명성답게 티켓 마스터에서조차 예매가 불가능했다. 이미 다 매진이 되어버리고 난 후였다. 해외 사이트를 샅샅이 뒤져도 원하는 날짜의 표를 잡기가 힘들었다. 결국 엄청난 중간 수수료를 감안하고 한국의 모 사이트를 통해 뮤지컬을 예매했다. 원하는 자리를 선택할 수 있는 티켓마스터에 비해 좌석 자리도, 구체적인 티켓 생김새도 알려주지 않고 사이트는 '예매가 완료되었습니다'라는 글자만 보여주었다. 200불이 넘는 카드 결제 문자를 들고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이게 정말 예매가 된 건가? 싶을 정도로 간단하고 허전한 화면이었다.


우습지만, 표를 예매한 벌써부터 큰 위안으로 작용한 요소가 하나 있었는데 이 뮤지컬이 상영하는 극장의 이름이 <유진 오닐 극장>이라는 사실이었다. 뭐 원래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 시점에는 별게 다 설레고 기쁘고 그런 것 아니겠나.

유진 오닐은 노벨 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희곡 작가인데 특히 미국 연국에서 처음으로 사실주의 기법을 도입한 작가라고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에는 최초로 영어를 미국 방언으로 발음한 대화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어느 정도의 비극과 개인적인 비관론을 담고 있다.. 고 위키백과에 쓰여있다. 왠지 이 뮤지컬과 제법 잘 들어맞는 성향의 사람인 것 같아 더 마음에 들었다.








고디바와 세포라에서 기념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유진 오닐 극장으로 향했다. 다른 뮤지컬들은 입장시간에 맞추어 도착했는데 이날은 일부러 30분 정도 일찍 방문했다. 조금이라도 더 현장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다. 거의 맨 앞줄에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표를 받아 들고 극장 안으로 들어가고 나니 자리를 안내해주기는커녕 빠른 영어로 잠깐만 서있어, 넌 앉지 말고 잠깐만 서있어 라고만 말하는 게 아닌가.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 짐을 들고 불편한 자세로 힘들게 뮤지컬을 관람해야 하나?

알고 보니 내 표가 조금 특이한 표였던 모양인데, 남는 자리들을 배치해주는 시스템이었다. 사실 그때 너무 긴장해서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아직도 내가 어떻게 그 자리에 앉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결론적으로는 무대의 왼쪽 편, 앞에서 네 번째 줄에 앉게 되었다. 다른 극장들에 비해서도 눈에 띄게 작은 좌석들 사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야 하는 불편한 구조에 짐도 잔뜩 쥐고 있어서인지 온몸이 뻐듯했다.








현재 공연 중인 뮤지컬이 몰몬의 책이었어서 그런지 전반적인 공연장의 분위기 자체가 홀리(??)해 보였다. 현대식 공연장들과 다르게 난간과 계단, 기둥 등에 오밀조밀하게 새겨진 문양들이 인상적이었는데, 잘 모르긴 하지만 원래 극장의 분위기가 이런 곳이지 않을까 싶다.

자리에 앉아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뮤지컬 첫 장면... 모로 나이와 예수님이 나오는 장면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배경;;;;








옆에는 아주아주 인자한 인상의 덩치 큰 노부부가 앉았다. 앞자리에도 덩치 큰 노부부가 앉았다. 할아버지들은 머리가 홀랑 벗어지셨고 비좁은 자리에 대해 한참을 툴툴댔다. 그날 인상적이어서 수첩을 꺼내 빠르게 받아 적은 대화.


앞 할아버지 : 나 키커서 뒤에 너네 안보일까 봐 머리 밀었쩡 헤헤(자신의 대머리를 매만지며, 이 두 부부는 전혀 아는 사이가 아님)

옆 할아버지 : 어 나돈데ㅋㅋㅋㅋ(이 할아버지도 대머리)

옆 할머니 : You both 배려 절어

옆 할아버지 : 와이프가 젊었을 때부터 모자가 잘 어울린다는 말 자주 해서 일부러 대머리 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41살 때 대머리 됨. ㅋ

앞 할아버지 : 어 난 40살 때부터 대머리 됐는데 나도 와이프가 시킴. 역시 와이프 말은 듣는 게 아니야

옆 할머니 : ㅎㅎㅎ 결혼은 하는 게 아니야. 알았죠 영 레이디?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옆에서 이들의 대화를 듣다가 큭큭 웃었고 할머니는 재차 나에게... 결혼은 하는 거 아니라며, 남자는 만나는 거 아니라며 거듭 당부의 말을 건넸다.


까먹을까 봐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이 대화를 빠르게 적었다. 그러자 옆에 앉은 할머니가 물끄러미 내 종이를 바라보며... 어느 나라 언어냐 어디서 왔냐 친구들은 어딨냐 이것저것 물었다. 산타 모니카에서 왔다는 할머니는 내가 혼자 왔다는 말을 하자 눈이 엄청나게 커지며 '여보 얘좀 봐요 뉴욕에 혼자 왔대 ㅠㅠ 아이고 용감해라ㅠㅠ' 하고 여러 번 토닥거려주었다.

나는 그 극장에 앉아 그 무대를 바라보며 그리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온 몸이 둥실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극이 시작하기 전까지 20분 내내 즐겁게 수다를 떨었다. 나는 그냥 이 뮤지컬이 보고 싶어서 온 건데, 이게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죽기 전에 한번 실제로 이곳에서 이 공연을 보고 싶었고 그래서 온 것이고, 그 황홀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뿐인데 그를 기다리는 이 짧은 시간마저도 행복했다.


<나는 울 거 같다> 메모지에 그렇게 적었다.








몰몬의 책 오프닝 곡인 헬로는 띵동 하는 벨소리와 함께 시작하는데



https://youtu.be/OKkLV1 zE8 M0





이 띵동 소리를 듣자마자 나 갑자기 입은 웃는데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거지. 왜냐면 무대 불이 꺼지고 주인공 엘더 프라이스에게 조명이 가있는데... 배우가 헬로 마이 네임 이즈 엘더 프라이스 하는데... 글쎄 배우의 침이 보이는 것이다. 변태 같지만 그때 내가 속으로 외쳤던 것은 '헐. 침이다! 침 튀기는 게 보인다!'였고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공연을 보는 내내 그랬다. 정신없이 터지는 개그와 유머 코드는 발랄했다. 화려한 무대는 일일이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완벽했다. 아 너무나도 유려한 뮤지컬이었다. 공부를 해간다고 해갔음에도 모든 스크립트를 완벽하게 알아들을 수 없었던 점이 가슴 아팠다. 사실 영어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 정말 영어실력이 많이 부족하구나 라는 반성도 했는데 사실 그 반성은 그냥 거기서 끝났다. 헤헤. 한국에 오니 리을님 같은 분이 완벽하게 번역도 해주시고 해서, 굳이 내가 영어를 마스터하지 않아도 다른 실력자가 올려주시는 것들을 잘 찾아내면 되는구나 라는 위안만 무럭무럭 자라게 되었다. 하하.


인터미션 때 옆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다시 말을 걸었다. 재미는 있는데 자기는 너무 정신이 없다며, 콜라 사러 갈 건데 혹시 마시고 싶은 것 있냐고... 친절하신 분들이었다.

사우스 파크도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나야 이들의 정신없는 블랙 코미디가 가슴으로 와 닿곤 했지만 내 뒤에 앉은 미국인들은 인터미션 때에 비열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개그에 대한 약간의 불만을 토로했다(실제로 이 뮤지컬은 미국인들이 보기에도 약간 거북할 수 있는 인종, 종교 등의 이슈가 주를 이룬다). 옆자리의 할머니도 중간중간 실제로 내 팔을 톡톡 치며 '넘 못됐엌ㅋㅋㅋㅋㅋ'이라는 말만 세네 번은 한듯했다. 대각선에 앉은 한국인 어머니들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이 풍자와 비판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인지 고개를 꾸벅거리며 졸기도 했다. 그래 솔직히 그렇게 오타쿠처럼 공부하고 간 나도 이해 못하는 것들이 태반이었다. 이 공연이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뮤지컬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잘 안다.






그러나 나는 정말 정말 좋았다. 마지막 엔딩곡 때 다시 눈물을 흘릴 만큼.


옆에 앉은 할머니는 공연장에 나서면서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가 내 손을 다시 잡았다.

'그 나이에 혼자 뉴욕에 온건 정말 대단하고 용기 있는 일이야. 이제 인생의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을 거야. 너는 대단해'


그 말을 들은 나는 감사하다며 한국말로 안녕히 가세요 라고 말했다.

공연이 끝나고 모두가 극장을 나설 때까지 서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일부러 타임스퀘어를 둘러 멀리멀리 걸었다.



저 먼 나라 전혀 관련 없는 지역의 사람이 동영상 채널을 통해 하나의 클립에 꽂히고, 그것과 관련된 모든 것을 알고 싶어 몇 년 동안 정보를 끌어모으고,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 새로운 곳을 방문하게 되고, 결국에는 <직접> 체험하게 하는 힘.

식상하고 상투적이며 지나치게 감성적이어서 오글거리지만 이게 바로 콘텐츠의 힘 아닐까.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길거리의 작은 것만 봐도 살갑게 기뻐하는 외국인 관광객들과 침 튀기는 배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던 나.

새삼 그 힘이 느껴졌다.

그 힘을, 그 순간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마지막 열두 시를 맞았다. 숙소에 도착했지만 바로 잠들지 않고 창문 바깥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아마 평생 다시 보기는 힘들겠지.

다음에 올 때 그때 방문하겠다며 일부러 들르지 않았던 곳들도 평생 그리기만 하며 지내야 할 수도 있겠지.


안녕. 나는 이제 돌아간다.

밤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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