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설의 '오늘의 잇컬러'
요즘은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 보다
‘꾸준히 계속하는 것’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열정이 식은 것은 아니다.
하고 싶은 일도, 호기심이 생기는 대상도 여전히 많으니까.
다만 예전처럼 갑자기 에너지가 솟구치지는 않는다.
조금만 속도를 높이면 몸이 먼저 신호를 보낸다.
"잠시 멈춰야 할 때"라고,
그래서 이제 열정을 더 키우는 법보다,
이 열정을 어떻게 오래 가져갈지를 더 깊이 고민한다.
문제는 열정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열정을 지탱할 ‘체력’에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앞서가는데 몸이 따라오지 못할 때, 우리는 자책이라는 늪에 빠지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올리브 그린(Olive Green)이라는 색을 떠올린다.
이 색은 나에게 ‘지속’의 다른 이름이다.
1889년, 빈센트 반 고흐는 생애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났습니다. 그때 탄생한 작품이 바로 <별이 빛나는 밤에>입니다. 소용돌이치는 하늘과 불꽃처럼 치솟는 사이프러스 나무는 그의 격렬한 내면을 그대로 투영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강렬한 작품을 그린 이후, 고흐가 밤의 풍경을 반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대신 그는 생레미 요양원 주변의 올리브 나무를 1889년 한 해에만 15점 넘게 그렸습니다.
올리브 나무는 화려하지 않습니다. 선명한 초록도 아니고, 때로는 탁한 그린이나 회갈색에 가깝습니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이 나무를 “그리기 매우 어렵고 특색 있는 대상”이라 고백했습니다. 형태가 일정하지 않고, 빛에 따라 색이 끊임없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별이 빛나는 밤〉의 사이프러스가 내면의 고통을 하늘로 폭발시키는 상징이었다면, 올리브 나무는 그 불안을 대지에 붙잡아 두는 존재였습니다. 위로 치솟는 긴장 대신, 옆으로 비틀거리면서도 끈덕지게 버티는 형태였습니다. 고흐는 <산악 풍경 속 올리브 나무>를 그리며, 이를 <별이 빛나는 밤>에 대한 ‘낮의 보완작’이라 불렀습니다. 밤의 격정을 쏟아낸 뒤, 그 감정을 견디고 붙잡아 줄 현실의 풍경을 낮의 빛 속에서 다시 찾아낸 것입니다. 올리브 나무 연작은 감정의 극단을 부정하는 작업이 아니라, 현실의 시간 속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균형을 잡아주는 ‘회복의 의식’이었습니다.
파블로 피카소는 시대의 비극을 가장 적나라하게 기록한 화가입니다. 대작 <게르니카>에는 폭력과 파괴의 비명이 흑백의 이미지 속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그토록 처절한 파괴를 목격했던 피카소가 전쟁 이후 선택한 상징은 화려한 승전보가 아닌, 비둘기가 물고 있는 작은 '올리브 가지'였습니다.
피카소에게 올리브는 아무 일도 없었던 평온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잃고도 '결국 살아남은 상태'를 의미했습니다. 올리브 나무는 불에 타 그을음만 남았을지라도, 깊은 뿌리만 살아있으면 다시 자라나 열매를 맺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습니다.
피카소는 전쟁의 불길 속에서도 인류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근거를 그 강인한 뿌리에서 찾았습니다. 그의 드로잉 속 올리브는 색채마저 덜어낸 채 오직 본질적인 선으로만 존재합니다. 화려하게 치장할 에너지를 아껴 오직 '지속'하는 것에만 집중한 뼈대 같은 선. 그것이 피카소가 정의한 진정한 평화이자 체력이었습니다.
올리브 나무는 '불멸'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어떤 나무는 수령이 무려 2,000년을 넘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 아테네의 수호신 결정전에서 아테네인이 포세이돈의 샘물 대신 아테나의 올리브 나무를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당장 목을 축일 샘물보다, 수백 년간 시원한 그늘을 내어주고 영원한 먹거리가 되어줄 나무의 '지속성'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올리브 나무가 이토록 오래 살 수 있는 비결은 역설적이게도 '느림'에 있습니다. 올리브 나무는 서두르지 않습니다. 척박한 토양에서 비바람을 견디며 한 층 한 층 아주 느리게 나이테를 쌓아 올립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목질은 그 어떤 나무보다 단단하여 세월의 풍파에도 쉽게 썩지 않습니다.
우리의 열정도 하루살이가 아니라 천년을 버티는 올리브 나무를 닮아야 합니다.
반짝하고 타오르는 불꽃은 화려하지만 금세 재가 됩니다. 하지만 느리더라도 단단하게 쌓아 올린 나이테는 삶의 거센 바람 속에서도 우리를 지탱해 줍니다. 지금 에너지가 예전 같지 않다고 자책하지 마세요.
당신은 지금 더 단단한 나이테를 만드는 '지속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종종 열정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열정은 의지만으로 타오르지 않습니다.
체력이 없으면 아무리 열정 가득한 마음도 금세 바닥을 드러내고 맙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뜨거운 불꽃이 아니라,
그 불꽃을 지탱할 '올리브 그린' 같은 체력입니다.
올리브 나무처럼 비틀리고 구부러질지언정 뿌리를 깊게 내리고 매일을 견뎌내는 것.
그래서 저는 올해의 열정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더 세게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더 오래 남아 있는 것."
열정에도 체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체력은,
조용히 매일을 지키고 버텨낸 시간에서 만들어집니다.
오늘 하루,
너무 잘하려 애쓰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더 걷는 것을 계속해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