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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youngjoo Sep 21. 2020

코로나때문에 단골가게가 사라졌다

단골집이 간다는건 인생의 기억도 함께 떠나간다는것

자주가던 동네떡볶이집이 폐업했다. 떡볶이집 이전에 이미 타코집, 이자카야가 폐점했지만 떡볶이집 폐업이 내게는 가장 큰 충격이었나보다. 이런 글까지 쓰게 된 것을 보면 말이다. 아이 학교 옆 시장에 위치해 있던 그 떡볶이체인점은 손님이 너무 많아서 매일같이 줄을 서서 입장하던 그런 곳이었다. 그런 곳조차 코로나 타격으로 문을 닫게되다니. 슬픔이 밀려왔다. 생각해보니 나부터도 올해는 시장 골목안에 들어가본 적이 없었다. 하교하는 아이와 함께 부산식 어묵과 물떡을 사들고 나와 길을 걷던 기억이 아련하게 밀려왔다. 너무나 평범했던 그것과 똑같은 경험은 다시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너와 걷던 그 거리를 걸으면 우리 함께 듣던 그 노래를 들으면 네가 생각난다는, 언젠가 유행했던 사랑노래가사가 떠오르는 것 같은 상황이다. 그러고보면 그때 듣던 노래를 들으면, 너와 걷던 거리를 걸으면같은 것보다도. 어쩌면 자주 가던 단골집의 음식이란 가장 직관적으로 그때그시절 추억을 소환하는 기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생 때 자주 시켜먹던 배달피자집이 있었다. 이름은 아마도 피자파켓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확실치 않지만 그렇게 기억하는 이유는 우리가족이 그 가게에서 언제나 피자파켓만 주문해먹었기 때문이다. 처음은 잘못배달되어진 ‘피자파켓’으로부터 시작됐다. 아마도 주인내외가 직접 배달을 하는 것 같았던 그 집의 주인아주머니가 한 비닐봉지를 건넸고, 그 안에는 쿠킹호일뭉치가 덩그러니 들어있었다. 주문한적 없다는 우리의 말을 듣고 잠시 벙찌던 그 아주머니는 어딘가에 전화를 해보더니 “그냥 드세요”하는 말과 함께 그 호일뭉치를 남겨두고 떠났다. 호일을 열어보니 안에는 뜨끈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다란 만두모양의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피자를 반으로 접은 것 같기도 하고 커다란 만두피에 피자소를 넣어 만두를 빚은 것 같기도 한 그것의 이름이 피자파켓(pizza pocket)이었다. 그날의 잘못된 배달 이후로 우리가족은 그 피자포켓을 자주 주문했는데 아직도 한번씩 그 집이 떠오른다. 그럴 때면 젊고 흙발머리숱이 가득했던 우리엄마와 엄마가 집에서 입고있던 잠옷이 떠오른다. 그 잠옷에서 피자치즈냄새가 피어오르는 기분이랄까.


또 하나 피자에 대한 기억은 초등학교 고학년때 쯤이었나. 동네 상가에 문을 열었던 피자뷔페이다. 동네상가에 있는 것치고는 좀 세련된 인테리어에 피자도 맛있었던 그 집은 심지어 피자뷔페이긴한데 서버가 직접 갓구운 피자를 가져다주는 그런 시스템이었다. 아빠엄마동생과 그집에 가서 앉아있으면 어린 나이에도 대접받는게 이런 기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런 가게였다. 처음 피자를 베어먹을때면 너무 맛있어서 열판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맨날 나 같은 손님이 오면 뷔페 망하겠다”라고 말하다가, 두 판정도에 접어들면 언제그랬냐는듯 서로 피자를 양보하며 딱 적당한 만큼만 먹고 나왔던 그 피자뷔페를 생각하면 행복했던 우리가족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고등학생때 자주 가던 뼈다귀해장국집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제 어른이 된양 들떠있던 나와 내 친구들이 생각난다. 그 뼈다귀해장국집은 집에서 가까운 대형보습학원 길가에 있어서 학생들보다는 직장인, 특히 아저씨들이 많았지만 워낙 대형프렌차이즈 가게라 허름하거나 무서운 분위기는 아니었고 오히려 활력이 넘치는 분위기였다. 학원야간자율학습을 같이 하던 친구와 뼈다귀해장국에 사이다를 마실 때면 마치 이미 내가 어른이라도 된 듯한 기분좋은 착각이 들었었다. 사실 친구들은 근처의 탕수육집을 더 가고 싶어했고 이래저래 안맞는게 많았던 데다가 서로 예민한 시절이라,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하지만 싸워봤자 하루종일 학교에서 얼굴보고 학원와서 또 잠들때까지 얼굴보는 사이에 싸움은 오래가지도 못했다. 그러고보면 대학교때 이후로는 친구와 싸우는 일이 없었던것같다. 어딘가 어긋나면 멀어지다가 손절하는 식. 뼈다귀해장국을 함께 뜯던 친구들은 내가 싸웠다가 다시 가까워진 마지막 인류일지도 모르겠다. (아, 남편은 예외)


대학교때는 거의 혼밥을 했다. 대학때는 공부를 참 열심히 했고 교외활동도 엄청 많아서 정말 바쁘게 살았다. (일학년때 하도 뽀지게 놀아서 학점은 좋지않다. ㅎㅎ)시간표와 상관없이 아침일찍 등교해서 참치김밥한줄, 아이스라떼, 생수한통을 사서 강의실로 바쁘게 걸어가던 내가 생각난다. 학교에서 제일 맛있는 김밥을 파는 곳이 내가 나온 사회대학 캠퍼스 안에 위치해있어서 나는 학관식당은 거의 가본적이 없다. 학교에서 먹는 밥은 내게는 마요네즈 듬뿍 뿌린 참치김밥이었다. 아직까지도 마요네즈를 보면 학교가 떠오를 정도다. 오랫동안 학교 명물로 자리잡았던 그 김밥집이 몇년전 문을 닫는다고 해서 친구와, 딸을 데리고 방문해 마지막 참치김밥을 사먹었었는데, 추억의 빨간 소파에 앉아 김밥을 먹고 있으니 이렇게 딸이랑 집에만 있을건데 난 무엇을 위해 그리 바쁘게 공부했나 생각하며 조금 허탈해지기도 했었다.


직장생활을 할때부터는 너무도 많은 단골집이 생겨 하나하나 기억해봤자 그다지 아련한 마음이 들 일이 없는데 생각해보니 한 군데가 생각났다. 광화문 틈새골목에 있었던 매운라면을 파는 조그만 가게다. 거기에서 나는 늘 빨계떡을 시켜먹었다. 사실 식사라기보다는 그건 낮부터 하는 해장이었다. 나는 술자리가 많은 직장을 다녀서 맨날 회를 고기를 먹었는데, 어차피 불편한 자리여서 달갑지도 않았다. 몰래 혼자먹을수있는 기회가 있을때마다 가까웠던 동료들과 빠져나가 먹었던 매운 라면이 자주 생각나는데 요새는 집근처에서 그 체인점을 본적이 없는 것같다. 집에서 라면을 먹을 때 가끔 고춧가루를 있는대로 넣어 먹어봐도 그 비슷한 맛이 나지 않는다.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면서도 좀 웃긴 단골음식점에 얽힌 추억이 하나 있다. 유명 체인키즈카페 릴리펏의 해물떡볶이와 피자가 그 주인공이다. 나는 독박육아로 아이를 다섯살까지 집에서 키우면서 진짜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내가 자처한 일이지만 나름대로 몸과 마음고생도 엄청 많이 했다. 그와중에 키즈카페에 가서 책읽고 이웃엄마들과 잠깐 수다떠는게 정말 큰 위로였는데, 고만고만한 키즈카페에서 맛없는 음식맛에 익숙해져있다가 처음 방문한 릴리펏 해물떡볶이가 그렇게 맛이 좋았다. 나중에는 그 떡볶이 국물맛이 떠올라서 애는 얌전히 집에 잘 있는데 들쳐엎고 키즈카페를 갈 정도였다. 그런데 애가 초등학교 갈 때즈음이 되어서 오랜만에 생각나서 마지막으로 키즈카페 가자며 장성한(?) 애를 데리고 방문한 그곳에서 다시 만난 해물떡볶이가 생각보다 정말 무미건조 밍숭맹숭했다. 결국 육아헬에서 허덕일 때는 별것도 아닌게 그렇게 맛있었던걸로 결론이 나서 어이가 없어 한참 웃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놓고서 지금, 또 다시 아쉽고 그리워할 새로운 단골집 역시 학교앞 떡볶이집이라니. 어쩌면 몇년 후의 내가 또 웃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보면 이동네 모든 내가 그리워할 맛집은 하나도 빠짐없이 딸과 함께한 가게들이다. 학원 픽드랍하면서 혼자서만 발견한 작은 카페조차도, 어김없이 며칠안에 딸에게 소개하고야 마니까 말이다. 앗, 백퍼센트 나중에 ‘딸의 학창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단골집’ 이러면서 엄청 그리워할 각이다.


사진은 폐업과는 무관한 요즘 좋아하는 동네브런치가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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