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밥 좋아하세요?
엄마밥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식들은 주로 빨간색이다. 돼지고기를 잔뜩 넣은 김치찌개, 불고기감 소고기나 삼겹살을 넣어 만들고 그 위에 모짜렐라 치즈를 녹였던 김치볶음밥, 참치를 넣고 볶아 밥 위에 올려 먹었던 김치참치볶음같은 것들이다. 하나같이 김치가 들어간 것들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어쩌면 너무나 멋없게도 '김치'일지도 모른다. 딸아이조차 "우리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신김치랑 커피야"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다. 그런데도 삼시세끼 집밥순이가 된 나는, 김치는 한번도 만들어본 적이 없다. 만들어본 적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김치만큼은 직접 만들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까지 해버렸다.
결혼을 하고 식탁살림을 도맡다보니,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김치조달이었다. 나 역시도 엄마가 해줬던 김치찌개, 김치볶음밥, 김치덮밥을 줄기차게 만들어댔는데 문제는 거기에는 정말 많은 김치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이탈리아인의 레시피에 늘 포함되어 있는 바질을 레시피 재료에 적어두지조차 않고 '화단에서 좀 뜯어오세요'하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게 한국음식 레시피에서 '냉장고에 있는 김치를 사용하세요'라는버전이라는데, 이상하게도 우리집 냉장고는 김치화수분이 아니었다. 김치를 너무 많이 사용해서인지는 몰라도 한국인의 냉장고인 우리집 냉장고에서는 김치가 떨어지는 날도 종종 있다.
요즘 우리집 냉장고 속 김치는 반은 엄마김치고 반은 '조선호텔김치'나 '비비고조각김치'다. 신혼때에는 엄마김치로 100% 채웠지만 점점 사먹는 김치가 지분을 늘려갔다. 김치가 떨어질 때마다 매번 얻으러 가기가 민망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이모들과 김장을 하면서 나를 불렀다. 몇번 가서 김치는 안만들고 수육만 먹고 오기도 했다. 요리를 좋아하지만, 어쩐 일인지 김치만드는 법만큼은 정말 배우기가 싫었다. 김치를 직접 담그지 않는것만으로도 엄마세대와는 다른 여자가 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을 보기좋게 깨버린건 중학교 동창의 sns에 올라온 김치사진이었다.
유럽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된 친구의 sns에는 직접 담근 배추김치와 열무김치사진이 올라와있었다. '김치가 은근히 만들기가 쉽고 자기가 만든게 가장 입에 맞아서 다른 김치는 못사먹는다'는 내용의 글과 함께였다. 학창시절 교내영어말하기대회에서 우승을 도맡아 했던, 내가 아는 가장 똑똑하고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현대여성' 가운데 하나인 그녀는 김치도 나보다 잘 만들었다.
김치를 직접 만들어 먹으면 '구식여성'이 되는 줄 알았다. 김장을 직접 하지 않는 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생각했었다. 어쩌면 김치에 대한 나의 이런 생각은, 전업주부로서의 삶을 택한 것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아직도 김치를 얻어먹고 사먹고 있지만, 돌아오는 김장철에는 돼지고기를 사서 엄마의 김장모임에 방문해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처음에는 덜익어서 맛있고, 익으면 익어서 맛있고, 푹익으면 묵은지가 되어서 또 맛있는 김치를 생각한다. 모든 여자는 아름답다는 말은 이미 구식이라고 한다. 여자가 아름다운게 미덕이라는 구시대적 가치관이 주입된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만큼은 언제나 괜찮지 않을까. 모든 김치는 다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