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좋아하는 사람들은 인간관계에 서툴대"
내가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때는 크리스마스 이브. 장소는 뉴욕, 그것도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꼭대기다. 더 없이 낭만적인 이 장소에서, 사랑하는 아내이자 엄마를 잃은 아버지와 아들은 한 여자를 기다리고 있다. 전망대가 문을 닫을 시간이 될때까지 이들이 기다리던 여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실망한 아들에게 역시나 실망한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들, 집에 가면 개를 사자."
영화 <시애틀의 잠못이루는 밤> 이야기다.
엄마의 부재를 못견뎌하는 아들을 위해, 아니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본인을 위해서라도, 아버지는 죽은 아내의 빈자리를 채워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운명이라 생각한 그녀가 나타나지 않자, 대신 '개라도 사서 외로움을 달래보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개가 정말 인간의 빈자리를 채워줄수 있을까? 개는 인간관계에서 서툴거나 혹은 인간관계에 지친, 어쨌거나 뭔가 정서적으로 결핍을 가진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그런 존재일까? 그래서 "개 좋아하는 애들은 인간관계에 서툴대"라는 말은 맞는걸까?
그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나는, 개를 정말정말 사랑하고 아끼면서도 친구도 많고 인간관계에 긍정적인 사람의 이름을 당장 다섯명쯤은 댈 수 있다!!!!
'다섯' 밖에 안되는 이유는 그 수가 적어서가 아니라, 요즘의 내 인간관계가 그만큼 좁기 때문이다. 음. 뭔가 이상하지만 사실이다. 내 경우를 보면, 답은 '맞다'가 될수도 있다. 나는 실제로 외로웠다. 그리고 그 외로움이 개를 입양하고, 사랑하게 만든 것일수도 있다.
'개를 사랑하는 사람은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편견이 어디서 기인된 건지 모르겠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 말을 사실로 믿는 것 같다. 내가 "유기견을 입양하겠다"는 다짐을 말했을 때, 다양한 반응들이 돌아왔다는 말은 이미 했었다. 그 중 제일 마음에 안들었던 반응은 "네가 무슨 노인네냐? 개는 외로운 노인네들이나 키우는거야"라는 말이었다. 내 답이 뭐였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아마도 강한 부정으로 답했던 것 같다. 이제와 생각해보건대 사실 그건 '괜히 찔려서' 버럭했던 것일수도 있다는 걸 고백한다. 아니 그런데, 좀 외로워서 키우면 안되나? 그게 뭐 어때서? 사실 나는, 정말 외로웠다.
이르다면 이른 나이에 '엄마'가 된 후, 몇년은 오롯이 세상에 나와 아이 둘만이 남은 것 같았다. 그야말로 평범한 가정주부인 나는 여느 다른 엄마들처럼 독박육아를 했고, 남편은 여느 사회초년생처럼 아주 바빴다. 자연히 하루종일 말을 한마디도 안하게 되는 날이 다반사였다. 아직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많은 친구들과는 자연스레 서서히 멀어져갔다. 일단 저녁 모임에 나가기가 힘들었고, 대부분 아직 미혼인 친구들은 나의 그런 변화를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나는 나대로 그게 너무 섭섭했다.
자주 만나게되는 애엄마들과의 만남은 친구들의 빈자리를 채우는가 싶었지만, 나를 더욱 혼란에 빠트렸다. '아이친구들과 인간관계가 필요하다, 없다'에 대한 말이 많은데, 나는 뭐든 인위적으로 하는 건 싫어해서, 그저 자주 마주치게 되는 엄마들과 만남을 가졌다. 단톡방이 생겼고, 자주 만남이 있었다. 앞에서도 말했듯 나는 할일이 아주 많았기에 모임이 성가셨던 적도 있었지만 자연스러운 인간관계라 생각해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사건이 터졌다.
같은 단톡방에 있는 엄마들끼리 싸움이 난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엄마들의 아이들끼리 싸움이 붙었다. 어린이집에서 치고받고 싸우던 두 아이중 한 아이의 이마에는 꿰맨 자국이 나 있었다. 맞은아이의 엄마도, 때린 아이의 엄마도, 각자 할말이 많았지만 맞은 아이의 엄마가 이겼다. 결국 때린아이는 어린이집에서 퇴학처분까지 당했다. 같은 나이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맞은아이 엄마의 심정은 백번 이해하고도 남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퇴학이라니, 매일 수다떨고 매일 만나 밥을 먹던 사이에 순식간에 자식을 어린이집에서 내쫓기까지 하는 원수가 되다니.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 엄마가 나간 후에도 단톡방의 친목에는 전혀 달라진 징후가 없었는데, 나는 그 불변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잠이 오지 않을만큼 생각이 많아졌고, 결국 나는 그 방에서 나가고 말았다.
외로운 사람이 개를 키운다, 인간관계에 서툰 애들이나 개에 집착한다는 말, 그 말의 진위여부를 가릴 능력이 내게는 없다. 하지만 '외로운 사람이 개를 키운다'는 말은, 역으로 '개는 인간의 외로움을 치유해줄 능력을 갖고 있다'는 말 아닌가? 실제로 반려견을 키우는 이들은 심장병으로 인한 조기사망의 확률이 현저히 낮다는 연구결과도 최근에 나왔다. 그래서 나는 당당하게 '외로워서 개를 키운다'고 답하고 싶다. 사실 모든 게 그렇지 않은가? 사람들은 외로워서 가방을 사고, 외로워서 술을 마시고, 외로워서 책을 읽고, 외로워서 사랑을 한다. 그게 어때서? 외로워서, 마음이 허해서, 뭔가를 하면 그게 뭐가 어때서?
나는 외로워서 개를 입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