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때와 다름없는 밤이었다.
9시가 넘어 갑자기 출출해진 것을 빼고는.
마침 냉장고도 텅 비어있어 온가족이 이마트로 출동했다. 그 날은 하필 한달에 두 번 있는 휴무일이었고, 평소 잘 가지 않았던 동네 작은 할인마트로 향했다. 처음 가본 마트는 생각보다 쇼핑하기에 좋았고, 신이 나서 과일을 잔뜩 샀다.
집에 돌아와 마트 옆 분식집에서 포장해온 떡볶이와 순대를 클리어하고 아까 사온 자두를 씻었다. 자두를 베어물려는데 세상 달큰한 향이 코끝으로 밀려왔다. 감탄해서 고개를 드는데 옆에 크리스가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평소 사람먹는 음식은 안주려고 하고 있지만, 자두와 내 눈을 마주보는 크리스를 외면하기 어려웠다. 그도그럴것이 자두향이 진짜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크리스의 큰 눈동자에 이끌려 자두를 내밀었다.
꿀꺽
크리스는 자두를 맛보지도않고 삼켜버렸다. 순간 쌔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음, 왠지 이러면 안됐을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인터넷검색을 시작했다.
"강아지, 자두"
내 예상-혹은 바람-과는 달리, 이 두 키워드의 조합으로 수십건이 넘는 글이 검색되었다. 그리고 글들은 무시무시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구토, 위세척, 장 개복 수술,,,
그랬다. 자두는 강아지가 절대 먹어서는 안되는 금지식품이었다. 포도나 복숭아도 그렇다고 했다. 다 처음 아는 정보였다. 아몬드도 안좋다고 했다. 요며칠 크리스가 노란 토를 하곤 했던 게 기억났다. 아몬드를 줄때마다 했던 구토였다. 개에 대해서는 제법 안다고 생각해왔다. 별로 공부할 건 없다고 생각했었다. '애 보는것에 비하면 껌'이라고 생각했었다. 개가 내게 주는 기쁨이 크다는 생각에만 젖어있었다.
딸아이 키울때는 쌀 한톨, 사과즙 한방울을 시작할때도 하나하나 검색해보며 유난을 떨었었는데, 크리스에게는 그러지 못한게 너무 미안했다. 자두씨나 복숭아씨 같은 것들은 개에게 특히 위험한데, 씨앗이 커서 개가 삼키게 되면 배변으로 나오지못하고 몸안에서 장기들을 찌르거나 썩거나 할 위험성이 크다고 했다. 생각보다 너무 심각한 상황에 나는 눈물만 나왔다. 이미 시간은 밤이었고, 병원에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이 되었다. 병원에 가면 바로 구토를 시키는데, 이 때 씨가 나올수도 있지만 소형견들은 구토를 하는 과정 역시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위에 걸려있을때 내시경을 했다거나, 빠르게 장으로 내려가 개복수술을 했다는 글 들을 읽고 있자니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나야 워낙에 과거지향형 인간인지라 '그때로 돌아가고픈' 순간들이 한두개가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정말정말 절실했다. 정말이지 딱 5분 전으로 돌아갈수만 있다면......ㅠㅠ
어마어마한 절망감에 휩싸여 정신을 못차리는 주인과 달리 크리스는 해맑았다. 아직은 과육들이 자두씨를 감싸고 있기에 아무 이상이 없는거겠지. 나는 크리스에게 미안한 마음에 정말 죽고싶은 심정이었다. 만약 크리스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그야말로 내손으로 독을 입에 넣어준 것이 아닌가. 뭐라도 희망을 찾고 싶었다.
한줄기 빛이 된건, 배변으로 나오거나 구토를 해서 뱉어나는 아이들의 수가 생각보다 꽤 된다는 것이었다. 크리스의 경우 체중이 4kg을 조금 넘는데, 이 정도면 아주 작은 소형견은 아니어서 나올수도 있다는 글들이 보였다. 일단 잠을 자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날이 밝았고, 나는 비닐봉투를 이용해서 배변을 샅샅이 훑었다. 하루종일 크리스가 볼일을 볼때마다 그렇게했다. 다니는 동물병원에 전화를 해서 "그런걸 먹이면 어떡하냐"고 한바탕 혼이 난후, 일단 지금까지 볼일을 잘 보고 있으니까 하루이틀만 더 지켜보자는 말을 들었다. 수의사와 통화를 한 후에도 하루종일 인터넷 검색을 하고, 크리스의 배변을 살피고, 크리스의 징후를 살폈다. 근심걱정과 피곤에 쩔어 잠에 든 나는, 다음날 구토 속에서 문제의 자두씨를 발견했다. 이놈의 자두씨, 다시는 집에서 자두를 먹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크리스를 끌어안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고마워, 고마워,,,,,
그 후로는 다시는 자두를 먹지 않았다. 해가 바뀌어 다시 자두철이 오면 어떨지 장담은 못하지만, 적어도 집에서는 씨 있는 과일들을 먹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참고로 개가 자두씨나 복숭아씨를 삼켰을 경우 수술을 하려면 몇십만원의 돈이 든다. 비용문제도 문제인데다 개복수술의 경우 성공여부도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다. 자두씨 때문에 죽었다는 개들의 후기도 봤다. 정말 크리스가 자두씨를 토해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개 키우기는 정말 생각보다 어렵고, 그렇기에 정말 신중해야 한다는걸 다시 한번 느낀 계기가 되었다. 내가 준 자두씨를 삼키고도 나를 순진하게 바라보던 크리스의 똘망똘망한 두 눈이 생각난다. 한번 주인이라고 믿게되면 어떤 짓을 해도 믿고 따르는 개라는 존재, 자신이 죽을때까지 나만 믿고 따른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자식보다 더한 '부담' 이 될 수 있는 게 '반려견 입양'이라는걸, 개를 입양하려하는 많은 사람들이 꼭 생각해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