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하지 않은 사랑을 꿈꾸다
1. 완벽한 사랑을 꿈꾸는 남자, 테오도르
테오도르는 대필작가다. 대필작가이니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야기(사랑하는 사람한테 편지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를 늘 접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직업을 갖고 있는 테오도르는, 자신도 모르게 완벽히 아름다운 사랑을 꿈꾼다. ‘이빨이 삐뚤빼뚤한’ 사진을 기억해뒀다가 몇 년 후 편지에 “삐뚤빼뚤한 당신의 치아가 보고 싶다”는 로맨틱한 사랑고백을 할줄 아는 테오도르의 표현력에는 “이런 편지 받으며 좋아서 넘어갈 것 같다”며, 동료들도 감탄하고야 만다. 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을 둘러싼 ‘진짜 관계’에는 별 관심이 없다. (서툰 게 아니라 별 관심이 없는 것이다) 지하철에서는 휴대폰만 쳐다보며 섹시스타의 사진을 본다. 그리고 밤에는 얼굴도 이름도 알 수 없는 상대와 음란채팅을 하면서 스스로의 외로움을 달랜다. 그는 누구보다 외로운데다, 누구보다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환상적인 ‘스킬’을 가졌음에도, 누구에게도 노력하지 않는다. 채팅을 하면서 그가 떠올리는 여자의 이미지는 낮에 본 섹시스타의 얼굴과 몸매에, 낮에 대필을 했던 여인의 삐뚤빼뚤한 치아를 가진 ‘아무도 아닌’ 가짜일 뿐이다.
2. ‘그것’이 아닌 ‘그녀’에게 빠지다
테오도르를 ‘구원’한 건 한 o.s.프로그램이었다. 교감에 목말라있지만 진짜 관계 맺기를 두려워했던 그는 ‘대화상대’가 되어준다는 한 o.s.를 구입했는데, 사만다라는 이름의 그 o.s.는 생각보다 훨씬 ‘인간적’이었다. 반신반의했던 테오도르는 점점 사만다에게 빠져들었고, 이내 그것을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에 빠진 테오도르에게 사만다는‘그것’이 아니라 ‘그녀’였다. 테오도르는 자신을 완벽히 이해해주는, 마치 대필작가인 자신만큼이나 완벽한 표현스킬을 갖고 있는 o.s. 사만다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3. 캐서린과 사만다가 그의 곁을 떠난 이유
테오도르는 사만다와 진정한 사랑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만다에게만은 모든 걸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 수 있었고, 비록 몸은 없었지만 사만다와 완벽한 영적교류를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이것이 가능했던 건 둘 사이에 ‘완벽한 사랑’이 존재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만다가 그에게 최적화된 o.s.였기 때문일 뿐이었다.둘이 헤어진건 사만다가 몸이 없어서도 아니고, 사만다가 600명이 넘는 사람과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기 때문도 아니다. 테오도르가 ‘있는 그대로의 사만다’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에게 맞춰주기만을 바랐기 때문이다. 사만다가 600명 넘는 사람들과 사랑을 속삭인다는 건 사실 예상치 못한 반전 축에도 못든다. 사만다는 그와의 첫만남에서부터 단 2초 만에 전화번호부의 이름을 죄다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공고히 했고, 기차 창가 밖으로 보이는 산의 나무가 몇그루인지 단숨에 맞출 수 있는 여자다. 테오도르는 ‘육체를 초월함’으로 인해 자신이 사만다를 오롯이 받아들였다고 믿었겠지만, 그건 테오도르의 착각이었다. 그 명백한 증거로, 테오도르는 둘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조차(600여다리 사실을 알았을 때) “무거운 얘긴 안해도 된다고”라고 말하며 문제의 본질을 회피했다. 이는 사랑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즐거움, 자신에 대한 공감)만을 취하려는 테오도르의 이기적이고 서툰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대사다. 이처럼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진정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춰줄 또다른 ‘밝고 낙천적이고 통통튀는 캐서린’이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빠졌던 것뿐이다. 하지만 ‘변변치 못한 배경 때문에 콤플렉스가 있던 캐서린’이 완벽하게 행복하기만 한 반려자가 되어줄 수 없었듯이, o.s임에도-혹은 o.s.이기에-사만다 역시 테오도르만의 맞춤형 동반자가 되어줄 수 없었다. 결국 사만다는 “자기를 사랑해. 하지만 인간이라는 속도에 맞춰서 읽다보니(네 입장에만 맞추다보니) 시스템적 오류가 생겼어”라며 결별의 이유를 설명하고(심지어 네가 바라는 그런건 물질세계에는 없다고 함), “간절히 바라긴 해도 자기라는 책 속에 살 수는 없다”며 테오도르를 떠난다.
4. 진짜 ‘그녀’는 에이미였다
사만다가 떠난 후 실의에 빠진 테오도르는 캐서린에게 떠나기 전(인지 떠나면서인지는 정확히 드러나지 않지만)갑자기 희미한 미소를 짓는데 그 때가 바로 테오도르가 자신이 사랑에 실패했던 이유를 깨달았을 때일 것이다. 테오도르는 이어 캐서린에게 음성메시지를 남기는 데 “당신을 내 틀에 맞추려고만 했었지. 정말 미안해”라는 사과를 한다. 그리고 테오도르가 이 메시지를 그녀를 직접 만나서하지도 않고, 편지나 이메일, 혹은 전화를 통해 하는 것도 아니고 영화에 등장하는 최첨단 과학기술에 맡기는 것도 의미가 있다. 이것은 사만다(o.s)가 떠났음에도 그녀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인데, 테오도르는 아마 이때 깨달았을 것이다. 힘들 때마다 자신을 위로해주며 서로 ‘진짜 감정’을 나눴던, 자신에게 필요한 반려자는 캐서린도, 사만다도 아닌 친구 에이미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실 영화에서 둘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다. 둘은 모두 이혼했고(아마 이유도 같을 것이다), 진짜 관계에 눈을 뜨지 못한채 온라인게임과 o.s에만 빠져있다. 그 외에도 에이미가 만들던 다큐에 대해 말하는 장면, 과일을 먹는 것에 대한 견해를 나누는 장면 등에서 에이미는 전남편보다는 테오도르와 더 닮아있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에이미와 테오도르의 사랑은 그렇게 아름답지도, 무엇보다 영화답지도 못하다. “그냥 외로울 때 옆에 있어서 만나는 거 아님?”정도의 사이가 바로 둘 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완전하지도, 마냥 아름답지도 않은 사랑’을 왜 굳이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영화는 이미 초반부에 말한 바 있다. 과일은 섬유질을 섭취하기 위해 먹는 것(완전한 사랑 등 무언가 목적이 있는 것을 의미)만은 아니며, (에이미의 말대로) 과일을 먹는 동안 기분이 좋았으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덧. 영화의 결말을 두고 ‘열린 결말’이라는 해석이 많은 것으로 안다. 뭐, 지금 쓴 리뷰도 내 해석일 뿐이지만 나로썬 이 영화의 결말이 ‘열려있지 않다’고 믿게 됐다. 테오도르와 에이미 두 사람은 죽은 것도 아니고 다른 뭣도 아니고 앞으로 ‘진짜 감정’을 나눠갈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결말 부분에서 처음에는 머리가 띵했다. 두 사람이 죽으러 갔다고 생각했는데, 자살할 거라 생각했는데 (특히 사만다가 물질세계가 아닌 곳에서 만나자고 했기 때문에) 에이미가 돌연 테오도르의 어깨에 기댔기 때문이다. 바로 이해가 가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내 스스로가 ‘사랑은 엄청 완벽하고도 완전한 교감이 이루어지는 어떤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테오도르였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