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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youngjoo Mar 05. 2020

일방향성이 진상을 만든다

너는 내 월급을 알고 있다

머그나 텀블러 신상이 나올 때마다 첫날에 들러 신상을 많이 사가곤 했던 고객이 있었다. 그 고객이 새로운 엠디가 출시된 날 여지없이 와서 텀블러 몇개, 머그 몇개를 가지고 계산대로 왔다. 평소 상냥한 고객이었기에 웃으며 대화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고객이 한 말이 제법 당황스럽게 느껴졌다.


"어휴. 진짜 이렇게 사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텀블러 하나를 들어올리며) 이거 하나 가격만해도, 그쪽 시급의 몇배잖아요?"


넌 얼마나 벌길래 그런 소리를 태연하게 꺼낼 수 있는지 묻고 싶어도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이 '카페일'을 통해 내가 벌어들이는 수입은 내가 말 안해도 그 고객이 빤히 알길이 있다. 누구나 카페알바의 최저시급에 대해 알 수 있다.


나는 그들의 수입을 모르지만, 그들은 나의 수입을 알고 있다. 이것이 불공정한 관계를 이루는 하나의 축임을 느끼게 된 건 그 텀블러고객 때문이었다.


능력을 재단당하는 것도 그렇다.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없다지만, 눈앞에서 내 업무상황을 지켜보면서 "적성에 안맞으면 때려쳐라"는 말을 불특정다수에게 들어야하는 직업은 서비스직이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진상고객에 대한 고통을 토로하는 인터넷게시판 등에서도 "근데 그게 서비스직이잖아. 그런 말 듣는게 기분 나쁘면 적성에 안맞는거 아닌가"라는 식의 반응들이 존재하는 걸 보면서 이건 진짜 반드시 개선되어야 하는 사회분위기라고 생각했다.


웃음도 그렇다. 사실 이 책을 쓰려고 했을 때, 나 역시도 친절한 서비스직을 만나면 기분이 좋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는게 여러번 마음에 걸렸다. 서비스직의 '미덕'이 친절함이라는 것 역시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서비스직을 두고 무조건 친절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 역시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 불편함의 이유를 어느정도 깨달았다. 서비스직이 친절해야 하고, 늘 웃고 있어야 하는 것이 그렇게 불편한 이유는 서비스직 혼자서만 친절하게 웃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친절하고 웃음을 띈 고객을 만났을 때는 당연히 서비스직으로서 최선을 다해 진심어린 미소와 친절을 베풀게 된다. 하지만 자신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왜 안웃어?"라고 묻고 짜증내는 고객들을 만났을 때, 혼자만 웃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 몹시 굴욕적으로 느껴진다. 이건 뭐 답없는 짝사랑보다도 더 절망적인 상황이다. 중학생때 학교 전체를 통틀어 인기가 엄청 많은 남학생이 있었는데, 그 학생이 어느 날 어떤 여학생에게 고백편지와 선물을 받은 직후에 그걸 거절하며 학교복도벽에 주먹질을 해 난리가 난적이 있었다. (고백을 너무 많이 받아서 귀찮다는 게 그 이유였다) 웃음과 호의를 전달했더니 폭언과 짜증이 돌아오는 상황을 그런 것에 비견할 수 있을까. 그 여학생은 그날 학교 모든 수업이 끝날 때까지 펑펑 울었다고 했다.


실제로 '짝사랑'을 고백해야 하는 서비스직도 있다. 콜센터상담사들이 그랬다. "고객님, 사랑합니다"하는 인사를 하는 콜센터 상담사들이 우울증을 많이 고백했다. 성희롱, 무응답, 멸시 등 많은 원치않는 반응을 얻으며 일방향적인 사랑의 아픔을 톡톡히 치뤘다.


혼자 사랑하고, 혼자 웃어주고, 혼자 월급과 실력을 재단당하며 무시당하는 사람은 괴롭다. 짝사랑은 자발적이기라도 하지, 저 모든 것들이 돈을 벌기 위해 필연적인 것이어야 한다면 그건 명백히 노동자의 권리를 무시하는 인권침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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