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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엉짱 Oct 14. 2024

기억에서 단어가 사라지는 날

[소소해도 행복한 걸 어떡해?]

요즘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어색한 순간이 자주 생긴다. 대화 중에 중요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나왔던 단어들인데, 이제는 입안에서 맴돌기만 하고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 순간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솔직히 조금 겁이 나기도 한다. 나는 머리를 싸매고 그 단어를 떠올리려 애쓰지만, 그럴수록 단어는 내게서 더 멀리 도망가는 것 같다.


이렇게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는 두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교차한다.      


‘아, 이건 당연한 현상이야. 세월 앞에 장사 있나?’     


먼저 드는 생각은 이렇게 나이가 들면 기억 속에서 단어가 사라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세월의 흐름을 느끼며 나도 이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적다는 것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렇게 자기 위로를 하고 넘어가려 한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안함이 살며시 자리를 잡는다. 혹시 뭔가 건강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단어가 사라지는 경험은 때때로 꽤 당황스럽다.      


“우리가 요 며칠 넷플릭스에서 재미있게 보고 있는 시리즈 말이야. 그거 말이야, 그거…. 뭔지 알지? 거시기….”     


“뭐 말이야? 흑백요리사 시리즈?”     


“그래, 그거 말이야. 흑백요리사.”     


아내와 저녁밥을 먹으면서 음식 이야기를 하다가 또다시 ‘그거’라는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아내는 답답한 듯 대답을 하고는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핫이슈가 되는 프로그램의 이름이라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자주 사용했던, 너무나 익숙한 단어였는데 왜 갑자기 떠오르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단어들이 기억에서 실종 사건은 점점 빈번해지고 있다. 마치 도둑이 내 머릿속에서 단어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훔치고 있는 것만 같다. 기억 속에 있던 단어들은 어느 날 갑자기 하나씩 없어져 버리고, 나는 기억이 빈 머리만 덩그러니 달고 있는 기분이다.


회사를 퇴직한 후, 이런 현상이 더 심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매일같이 사용했던 전문 용어들이나 일상적인 대화에서 흔하게 쓰였던 단어들이 슬그머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단어들은 이제 내게 쓸모가 없어진 걸까? 아니면 내가 그 단어들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면서, 그들도 나를 떠난 걸까?


회사 다니던 시절엔 수없이 많은 단어를 사용했다. 업무 미팅에서는 전문 용어들이 남발되고, 보고서를 작성할 땐 전문적이고 복잡한 문장을 쓰기 위해 수많은 단어가 필요했다. 한 번은 상사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너희는 항상 말을 복잡하게 해. 좀 간단하게 할 수는 없을까?”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단어들이야말로 우리의 무기였다. 말을 복잡하게 하면 그만큼 전문적이고 지식이 있어 보였으니까. 하지만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더 이상 그 단어들을 사용할 일이 없었다. 일상에서 쓰질 않으니 내 머릿속에서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된 책장을 뒤적이다가, 언젠가 한 번도 열어보지 않은 책을 발견한 것처럼.      


‘아, 이런 단어도 있었지!’     


하고 깨닫는 순간, 그 단어는 이미 내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상태였다. 이렇게 생각하니 순간 웃음이 났다.      

‘나도 이제 예전에 사용했던 그 수많은 단어 잊어버릴 나이가 되었구나. 그래도 괜찮아.’      


나 스스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살아가는 환경이 변하면 필요한 단어도 변하는 것이고, 사람마다 각자의 단어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재미있는 건, 기억 속에서 단어들이 사라지는 만큼 예전에는 전혀 쓰지 않았던 새로운 단어들이 기억에 자리 잡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내가 사는 오늘이 어제와는 또 다른 새로운 세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 속에서 예전에 쓰던 단어가 사라지는 건, 내가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나는 회사에 다니며 숫자와 성과에 얽매여 살았지만, 이제는 새로운 삶의 방향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그 단어들은 자연스럽게 나를 떠나고, 새로운 단어들이 기억의 빈자리를 채워가고 있는 것 아닐까?


이제는 예전에 알았던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도 크게 당황하지 않는다. 그저 내 삶의 변화를 느끼며 웃음이 날 뿐이다. 지금은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지만, 그 단어들은 내 삶의 일부였고, 내가 누구이고, 내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표현해 주었다.


사람의 기억은 물처럼 흐르고, 단어들도 그 흐름을 같이 하는 것만 같다. 기억에서 단어가 사라지는 날이 온다고 해서, 그것이 내 삶의 끝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더 새로운 단어들을 배우고, 더 다채로운 경험을 쌓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시간 이후로 기억에서 또 다른 단어가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삶은 원래 그렇게 흘러가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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