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경력직 입사 면접을 보게 되었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면서 재취업의 꿈을 이루고자 여기저기 입사 지원서를 넣고 있던 차였다. 그러다 헤드헌터로부터 서류 합격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번에 서류를 제출한 광업 업체에서 1차 서류에 합격하셨습니다. 실무팀장 면접이 다음 주에 예정되어 있으니 준비 잘하세요. 면접에 참석하실 거죠?”
오랜만에 들려온 합격 소식에 기쁨이 몰려왔다. 실업급여를 받기 시작한 후 여러 회사에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서류 전형을 통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입니다! 다음 주 면접에 꼭 참석하겠습니다.”
최종 합격도 아닌데 마음이 벌써 들떴다. 이번에 지원한 곳은 건설업체를 대상으로 석회석을 납품하는 광업 전문 기업이었다. 기업 영업 시장에서 15년을 보낸 내 경력을 믿고 도전한 자리였다. 물론, 이종 업종에 뛰어드는 것이 쉽지 않은 도전이라는 점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옷차림은 어떻게 할지, 넥타이는 무슨 색이 좋을지, 면접에서는 어떤 질문이 나올지,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내는 내가 영업직으로 다시 뛰어드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실적과 사람으로 인한 스트레스, 그리고 그로 인해 건강이 위협받는 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중년의 나이에 재취업을 준비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일단 도전해 보고 이후의 일은 나중에 결정하자며 아내를 설득했다.
며칠 뒤, 드디어 면접 날이 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양복을 차려입고, 면접 장소를 몇 번씩 확인했다. 목적지는 삼성동. 혹시나 늦을까 봐 한 시간 일찍 집을 나섰다. 출근 시간대라 지하철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지하철역에서 면접 장소까지 10분 남짓 걸었는데, 한여름 아침의 찌는 듯한 더위에 온몸이 땀에 젖었다.
면접관인 실무팀장은 중년의 남성으로,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다. 면접은 회사가 자리한 빌딩의 1층 카페에서 진행되었다. 커피 두 잔을 들고 오면서 그가 물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오시는 데 불편하지 않으셨죠?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사시는 것 같던데요...”
“지하철을 이용했습니다. 한 시간이면 충분히 오는 거리네요.”
본격적인 면접이 시작되었다. 실무팀장은 회사가 어떤 사업을 하고 있는지, 회사 규모는 어떤지, 시장에서의 위치, 거래하는 기업들, 그리고 입사 후 담당할 직무까지 쉴 틈 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중간중간 내게 질문을 던졌지만, 대부분 단답형으로 넘어갈 만한 질문들이었다. 30분 남짓한 면접 시간 동안 서로 주고받을 이야기는 대부분 끝난 것 같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술은 잘 드시죠? 이쪽 일을 하려면 술을 어느 정도 마셔야 하는데요.”
결국 나왔다. 기업 영업에서 빠질 수 없는 ‘술’ 이야기. 이 질문이 언제든지 나올 것 같아 고민이었는데, 마침내 나오고야 말았다. 나는 그에게 있는 그대로 대답하기로 했다.
“술은 잘 못합니다. 한 번 마실 때 맥주 한 병 정도요.”
“원래 술을 못하셨나요? 영업 일을 오래 하셨는데?”
“과거에는 많이 마셨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건강검진에서 간 수치가 매우 높다는 소견을 받았고, 그 이후로는 가급적 술을 마시지 않으려 합니다.”
그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전 직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영업 활동에 있어서 술이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이 사람은 내게 술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거짓으로라도 술을 잘 마신다고 해야 했나?’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희망과 기대는 불안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었다. 진실을 말한 것이 부끄럽지 않았고, 회사에도 좋은 선택이었다고 믿었다. 술을 둘러싼 불편함이 두고두고 문제가 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날 오후, 헤드헌터로부터 전화가 왔다.
“면접 결과를 말씀드리기에 죄송합니다만 불합격이랍니다. 그런데, 술 얘기는 뭔가요? 회사에서 다 좋았는데 술 때문에 어렵다고 하더군요.”
“술이요? 술 때문에요?”
“네. 그렇다네요.”
“요즘도 그런 곳이 있군요. 세상이 좀 바뀐 줄 알았는데, 제가 순진했나 봅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신 건가요?”
나는 헤드헌터에게 면접관과 나눈 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요즘에도 그런 곳이 있네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그 업종은 아직도 술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다음에 더 좋은 자리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처음에는 술 때문에 면접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과거 영업 현장에서 만연했던 술자리 문화가 떠오르자, 납득이 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더 넓게 보지 못한 내 불찰도 크다. 세상을 자기중심으로만 바라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이번 면접은 내게 반성의 시간을 주었다.
아내는 내가 면접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걱정이 많았던 것이다. 이제는 건강을 생각해 스트레스가 적고, 덜 힘든 일을 찾으라는 조언도 했다. 요즘 나도 내 건강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 과연 과거처럼 견뎌낼 수 있을까? 그래서 더 열심히 운동해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이번 재취업 활동의 결과가 좋지는 않았지만, 다시 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기회였다. 아마도 술 문제만 아니었다면 합격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기분 좋은 실패였다고나 할까? 내일은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올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