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날이면 텐션이 낮아진다. 우울한 날이면 아무 것도 하기 싫어진다.
이런 날이면 누군가의 배려하는 말조차 공격하는 말로 들리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내 기분이 태도가 된 것이다.
내 기분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내 기분을 이해해달라고 때를 썼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는 말아야지.'
이 말을 나는 군대에서 처음 들었다. 나는 운전병이었고 사수가 인수인계해야 하는 시기였기에 공구계원을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지금 못 나가면 언제 나갈지 모르는 휴가를 나가야했고 그 대가로 제대로 된 인수인계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공구계원 인수인계서를 보며 혼자 공부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매일 창고를 가서 공구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했고 창고에 있는 재산과 시스템 상의 재산이 맞는지 여러 번 확인했다. 그렇게 공구계원에 익숙해질 때쯤 나는 수리부속 계원일도 조금씩 해야 했다. 원래는 내 부대가 본부대와 같은 건물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통합수송부'로 공구계원은 우리 쪽에서, 수리부속계원은 본부 쪽에서 담당했지만 부대이전 문제로 수리부속 일도 인수인계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본부대 계원에게 수리부속 일을 배우며 익숙해질 때쯤 배차계원 일도 해야했다. 아무래도 수송부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배차를 짜는 것이었기에 우리 쪽 배차계원이 휴가를 나가거나 전투휴무를 사용하게 되면 내가 그 일도 해야했다.(공구계원, 수리부속 계원, 배차계원 중 배차계원 일이 제일 스트레스 받고 제일 힘든 업무였다. 차는 없는데 차를 꼭 내줘야 한다는 간부들 덕분에 늦게까지 업무를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결국, 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고 해야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필요한 사람이 되어 수송부 내에서 내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구계원 일보다 다른 일을 하는 날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심할 때는 배차계원은 운행을 나가고 내가 배차를 짠 적도 있다. 이런 일은 그래, 이해할 수 있다. 참을 수 있었다. 그만큼 잘해주는 선임도 많았고 동기와 후임들도 힘들지 않냐고 자주 물어봐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부대 내의 문제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친구가 동기였던 것.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내가 어느 포지션에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거의 잊혀 가던 옛날 일도 떠올라서 몇 십배로 힘들었다. 그래서 일을 더 많이 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신체적으로 힘들면 정신적인 부분은 무뎌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일시적이었다. 장기간 이렇게 하다보니 신체적으로도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무너지고 있었다. 억지로 괜찮은 척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이런 타이밍에 휴가를 나가야 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밀려 휴가도 내 마음대로 나갈 수 없었다.(tmi: 나는 결국, 첫 휴가 이후 1년을 넘게 못나가다가 말출로 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담배도 펴봤다. 그러면 뭔가 마음에 쌓여있는 것이 괜찮아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날숨을 내쉴 때 한숨을 쉬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었기에 일순간 편안해진 기분탓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 잠깐의 기분과 여유, 그리고 조금 몽롱해지는 기분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됐다.
그렇게 버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에도 많은 일을 하고 있음에도 말을 하지 않으면 보상을 주지 않는 군대의 시스템에 불만이 많았다.
그것이 쌓이다가 배차도 짜야하고 공구계원일도 해야하고 수리부속 일도 해야했던 날에 참아왔던 것이 터져버렸다. 혼자 입술만 삐죽 내밀고 있었다.
그래도 간부들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선임들에게 심술을 부렸던 것 같다.
말을 걸어도 퉁명스럽게 '지금 바쁩니다.'라는 말로 대화 자체를 거부했다.
내 기분을 알아줬으면 했던 어린 마음이었다.
평소에는 재미는 없더라도 좋은 말만 하고 웃으면서 말하던 내가 갑자기 그러자, 뒤에서 선임분들이 '쟤 오늘 무슨 일 있었어?'라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반응에 조금 괜찮아지긴 했었다.
그렇게 심술나 있었을 때, 나에게 잘해줘서 지금도 기억나는 선임이 와서 음료수를 주며 말을 했다.
"누가 괴롭혀? 뭐 힘든 일 있어? 힘든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그래도 기분이 태도가 되면 안 돼."
그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 이후로 내가 기분대로 행동할 때면 이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괜히 내가 힘든 것으로 상관도 없는 사람의 기분까지 상하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군생활을 하며 제일 많이 떠올린 말이었기에 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회에 나온 후 나는 부처가 아니기 때문에 다시 기분이 태도가 되어 행동했을 때가 있다.
굳이 할 필요없는 말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것이다.
곧바로 미안하다고는 했지만 다시 내 기분이 태도가 되는 어린 행동을 하고 있었다.
안일해졌던 것이다.
그래도 다시는 내 기분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해봤다.
그때가 월드컵 시즌이었다.
그렇지만, 그 말을 월드컵을 보면서 다시 다짐할 줄은 전혀 예상도 못했다.
바로, 벤투 감독님을 보고 다시 이 말이 떠올랐다.
경기는 가나전이었다. 심판이 이상한 판정을 자주 내린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으나 후반 추가시간에 마지막 코너킥을 주지 않고 끝낸 것은 권한 남용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이 부분에 대해 벤투감독은 강하게 항의했고 그 결과, 벤투 감독님은 레드카드를 받았다. 그 다음이 포인트다.
그렇게 격양되어 있음에도 가나 감독과 코치진과 악수를 할때, 화난 표정도 바로 풀고 정중하게 악수를 했다.
그때 가슴이 웅장해지면서 깨달았다.
'아 이게 어른이구나.'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순간 '그래도 기분이 태도가 되면 안 돼'라고 했던 말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그렇게 나도 저런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앞으로의 일에 더 어른답게 대처하기로 다짐했다.
이전에는 내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기 위해 소극적으로 대처해왔다.
-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
그렇게 내 기분이 풀릴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말은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아무말 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아무 말 하지 않는 내 모습에서도 괜히 눈치를 본다.
결국 간접적으로 내 기분이 태도가 된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적극적으로 대처하고자 한다.
내가 화가 나있고 우울해 있더라도 사람들이 말을 걸 때면 예의를 갖춰 대하기로 했다.
그렇게 내 기분을 안 들키고 전염시키지 않기로 했다.
좋은 곳에서는 좋은 말을 하며, 좋은 사람과 있을 때는 내 기분 때문에 그 사람이 상처받지 않도록
더 조심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이런 다짐에도 조금만 느슨해지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든지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기 위해'
계속 경계하는 삶을 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