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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이윤호 Nov 23. 2022

그때 방관했던 나에게

더 이상 방관하지 않도록...

 폭력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은 가해자고 그로 인해 피해 입은 사람을 피해자라 부른다. 물론 가해자의 폭력이 피해자에게 직접적으로 상처를 준다. 그렇지만, 피해자에게 더 슬픈 것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다. 다들 보고 있지만 누구 하나 나서지 않을 때 홀로 있다는 그 기분이 피해자에게는 더 큰 상처가 된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가해자와 피해자도 아닌 방관자라 부른다. 나는 방관자였고 그렇기에 주변 사람들의 방관을 견뎠다.


 제대로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힘든 부분이 있다. 내 글을 읽다 보면 고등학교 때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만큼 고등학생 시절이 나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지나가는 말로 언급한 중학교에서 나와 같이 고등학교를 왔던 친구가 전학을 간 일은 지금의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친구는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다. 그 동시에 나에게는 가해자이기도 했다. 나에게는 트라우마적인 부분이라 쉽게 꺼내기에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친구의 비밀을 알고도 친하게 지냈었기에 그 비밀이 전교생에게 알려질 때에 내가 어느 정도 보호해줘야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하지만 나는 두려웠다. 그 비밀에 내가 동조하면 나도 똑같은 사람으로 오해할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나는 합리화해갔다. 그 친구는 예술 쪽에 뛰어났기 때문에 공부를 하며 견뎌야 하는 이 학교와는 어울리지 않다는 합리화를 해가며 철저하게 방관했다. 그 친구가 나를 찾아와 대화를 하자고 해도 나는 무시했고 그 친구가 '너도 내가 괴물로 보여?'라고 물었을 때도 나는 무시했다. 그렇게 완벽하게 방관했다. 그 덕분에 나에게 관심이 생긴 친구들은 늘었지만 나의 마음은 불편했다. 그리고 그 친구는 2학년 때 전학을 갔다. 나는 철저하게 방관했지만 그 친구가 남긴 고마웠고 잘 지내라는 말이 담긴 편지는 나를 더 힘들게 했었다. 그 친구는 가해자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 제일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본인을 방관했다는 사실에 더 상처받았을 것이다. 그 친구의 어머니가 한 말이 있다. "걔가 그러더라. 다른 사람들이 다 뭐라고 해도 너만 옆에 있었다면 괜찮았을 거라고". 친구가 했던 "너도 내가 괴물로 보여?"라는 말과 그 친구의 어머니가 했던 말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어렸다는 것이 변명이 될 수 없지만 내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이겨내고 내 주장을 하기에는 너무나 어렸다. 아직도 힘든 일인데 그때는 더 무서웠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주변 사람의 방관을 견뎠다. 어느 순간 그 비밀의 나비효과는 나에게도 다가왔었다. '쟤도 그 부류 아니야?'라는 의심은 누군가에게는 확신이 되어갔다. 그 구실은 내가 만들어줬다. 그 친구의 전학 이후로 죄책감에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기에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안 좋은 방향으로만 행동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에 처음 겪는 무시도 내가 한 잘못에 대한 대가라고 여기며 견뎠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고민을 말했을 때 내가 원한 것은 명확한 해결책이었지만 우선 기다리라고 하는 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방관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게 호기심으로 물어보는 것이 더 아프더라. 누군가에게는 의심이 확신이 되어갈 때 나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아니다. 하지 못한 것이다. 내 잘못에 대한 당연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감추고 있던 비밀이 드러나면서 그 친구가 힘들었을 때 내가 그 친구를 무시했던 것이 오버랩됐다. 나에 대한 의심이 확신이 되어가는 누군가에게 대화를 걸었을 때 그 누군가가 나를 무시해도 난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었다. 사실 다른 사람보다 나 자신이 나를 죄책감에 가두고 방관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잘못된 선택이 내 청춘의 절반을 후회와 죄책감에서 살도록 했으니 이제는 죄책감을 조금은 덜어도 되지 않을까? 사실 이 마음은 더 오래 지속됐을지도 모른다. 친구를 사귀어도 고등학교 때의 기억으로 솔직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방관을 선택했지만 방관보다는 나에게 도움을 준 친구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도 분명 들은 것이 있어서 의심은 했겠지만 그냥 아무렇지 않게 평범하게 나를 대해줬다. 나는 방관했지만 방관을 하지 않는 그 친구들을 보며 나는 신기했다. 처음에는 오해했다. 그냥 호기심에 놀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고마웠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진심으로 나와 친해지고 싶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나의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 친구들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실 나도 굉장히 매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쌓을 용기가 생겼다. 물론 끝까지 방관했던 친구도 있었다. 본인의 마음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주변 분위기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한 친구들도 있었다. 나도 그랬었기에 이해한다. 이렇게 길게 내 서사를 이야기하며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나는 방관자였지만 수많은 방관을 견뎠기 때문에 이해해 달라는 것인가. 아니다. 내 경험으로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사회에 잘 어울리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선택의 순간이 온다. 사회의 분위기와 내 의지가 일치한다면 다행이지만 내 생각과 사회의 분위기가 다를 때가 있다. 모두가 YES라고 했을 때 나는 NO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에 대부분의 사람은 본인의 생각을 감추고 YES라고 답한다. 사회에 어울리기 위한 선택이기에 존중한다. 반면에 본인의 생각대로 NO라고 답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맞는 선택일지도 모르지만 이 선택으로 어떤 비난을 받을지 상상도 할 수 없다. 본인만 튀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딱지가 붙을 수도 있고, 위선자라는 낙인이 찍힐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괜찮을 것이다. 내 경험상 방관자와 방관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자존감이더라. 자존감이 높은 사람일수록 본인의 생각에 자신이 있고 본인의 선택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본인의 주장을 해나갈 것이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주변의 비난도 잘 이겨낼 것이다. 나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면, 그리고 내가 어떤 선택을 해도 존중해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나는 방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방관했고 우리는 방관해왔다. 그래도 이 글을 읽은 당신은 이제는 알았으면 한다. 네가 사회의 분위기와 어긋나는 선택을 했어도 너를 존중해주는 사람은 분명 있고 그 결정을 오히려 멋있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너의 결정에 고마워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그러니깐 옳다고 여기는 길을 가자. 더 이상 방관하지 말자. 내가 지나가는 말로 한 사소해 보이는 위로가 누군가에게는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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