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편한 글투 -
# 불편한 글, 불편한 마음
M의 새로운 기획 글을 봤다.
제목부터가 또 비장하다.
뚜껑을 열어 보니 치고 나가는
글의 기세가 비장하나
역시나 내용은 비장하지 않다.
자신의 몸을 부풀려서
자신의 약점을 감추려는 그의 글투가
난 여전히 불편하다.
그의 작품은 기이한 마력을 가지고 있다.
어떤 기획이든
작품 내용이 눈에 들어와야 되는데
그의 인간성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내가 그의 품성을 익히 잘 알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오래 보고 지내온 다른 작가들 글에선
내용의 집중도가 더 크지,
그 정도로 작가 모습이 선명히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글에 실어 보내는 M 마음의 소리가
내 예민한 촉수에 감지되는 거다.
빈곤한 내용을 화려한 글발로 치장한
글 이면 너머에 그의 진짜 목소리가 있었다.
나 여기 있어. 여기 있다고.
봐, 나 이런 사람이야.
내가 능력만 부리면
뭘 할 수 있는지 잘 봐.
어쩌면 그의 글은
그가 내고 싶은 진짜 소리가 아니었을지도.
글 뒤에 숨어서 자신의 존재감을
은밀하게 과시하고 있는지도.
나르시시스트가 글을 쓰면
이렇게 위험할 수 있구나.
대체 이 사람이 원하는 게 뭘까?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 걸까?
세상이 자기의 위대함을 알아주는 거다.
나르시시스트는 그게 글이든 사람이든
어떤 도구가 됐든
자기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쓸 수 있구나.
# 글 가스라이팅
M은 과연 자기의 이런 모습을 인지하고 있을까?
나의 다른 연재북에서도 말했지만
그는 현재 인지 부조화 상태다.
그 자신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공익을 위해 글을 쓰고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 믿음이 그의 행동과
얼마나 부조화를 이루는지는
금방 알 수 있다.
공익을 위한다는 사람이
자기 말 안 듣는 직원에게는
불이익을 주고 있으니까.
물론 이와 같은 팩트에
M은 '불이익'이란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거다.
그럼 자신이 보복이나 하는
속 좁은 사람이 되니까.
나르시시스트는 그런 자기 결함을
받아들일 수 없는 종족이라
양심이 거리끼지 않는 쪽으로
상황을 합리화한다.
결코 불이익을 주는 게 아니라,
상관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아래 직원을 단속해서
조직의 질서를 잡는 거라고 믿는 거다.
그렇게 믿으면 얼마든지
복수자에서 정의 수호자가 되는 거다.
그게 바로 나르시시스트의 세계관이다.
정말 놀랍고도
위험한 세계관이다.
그러니 아무에게나 공감해선 안 된다.
나르시시스트에게 공감하는 순간,
그의 먹잇감이 되는 거다.
사람도 잘 분별해야 되듯
글도 잘 분별해야 된다.
아무 글에나 공감하다간
지구가 둥글지 않다는 주장도
믿게 될지 모른다.
다행이다. 그래도 분별력이 좀 있어
그의 기획에 담긴 편협한 시각을
바로 캐치하고 반박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M은 날 어려워한다.
나르시시스트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가스라이팅이 먹히지 않는 사람이다.
무슨 말을 해도 자기를 믿어주지 않고,
아무리 불쌍한 척해도 꿈적하지 않는 사람.
M이 나에겐 가스라이팅을 시도하지 않는다.
최면 걸기가 가능한 사람인지, 아닌지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다.
불행하게도 그의 가스라이팅에 걸려든
사람들이 내 주위에 꽤 많다.
M의 편협한 논점에 최면이 걸려
이분법적 사고로 편 가르기를 하는 거다.
[이분법적 사고]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의 가능성에 한정하여 사고하는 오류.
가령, 넌 불평불만이 많으니
나쁜 사람이라는 식이다.
실제 M이 제시한 기준으로 선과 악을 가르는
현실을 보며 한탄했다.
M의 상관이자 부서장인 Y.
그도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중이다.
M의 화려한 필력에 넘어가,
같은 말 반복하는 선동 문구에
결재 사인을 해주니 말이다.
그것이 미칠 영향에 대해선
깊이 고민하는 것인가?
Y의 사고력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가 얼마나 소통이 어려운 인물인지는
Y의 글만 봐도 알 수 있다.
가스라이팅하는 글도 불편하지만
소통되지 않는 글도 얼마나 불편한지를
그가 제대로 알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