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투가 바뀐다고 사람이 바뀔까 보냐 -
# 생각의 틈
영상 글의 경우,
내레이션은 영상을 뒷받침해야 된다.
지면 글은 글 자체가 메인 요소지만
영상 글은 화면에 담긴 그림도
메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물론 영상의 목적이나 장르에 따라서
글이 주도하는 경우도 있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가
글과 영상이 합쳐진 형태면
영상만 봐도 파악되는 단락에서
내레이션은 생략해도 좋다.
그 여백에서 시청자는
자신만의 여운을 가질 수 있기 때문.
이슈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며
자신만의 깨우침을 스스로 취하는 거다.
내레이션으로 정의 내려주지 않아도
자기만의 답을 찾아갈 수 있게
장을 열어주는 것.
정말 시청자를 존중하는 PD라면
시청자가 생각할 수 있는 틈을
편한 의자 놓듯 곳곳에 배치하고,
생각 놀음 실컷 하라고
판만 깔아 주면 될 일이다.
하지만 M은 틈은커녕
이미 정리된 자신의 생각을 반복 설명한다.
행여라도 M이 깨우쳐 주려는 깨달음을
못 받아먹을까 봐, 쉴 새 없이 설명한다.
주입식이다.
이런 스타일이 어떻게 통하냐고?
상부 조직이 좋아하니까.
뭐야? 인민 방송이야?
출판 글이 아닌, 영상에서의 메인은
내레이션 글이 아니라 화면이다.
화면이 모든 걸 말할 수 있어야 된다.
내레이션 글은 보조 수단으로써
밸런스를 맞춰야 된다.
그런데, M의 경우
화면 뒤에 깔려야 될 내레이션이 글이
화면 앞으로 자꾸 튀어나와
영상을 압도한다.
Too much talk.
그래서 희한한 경험을 한다.
M은 영상에 출연하지도 않는데
영상에서 자꾸 M이 보인다.
# M의 글투가 바뀔 수 없는 이유
대체 내레이션이 왜 쉬질 못할까?
시청자를 믿지 못하는 거다.
시청자가 올바른 생각을 못할 거라고,
자신의 말을 다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고,
시청자 수준을 낮게 보는 거다.
대체 어떻게 결재가 날 수 있냐고?
상부 조직이 좋아하니까.
나르시시스트 M은 말발로 아래 직원을
가스라이팅 할 뿐 아니라,
글발로도
시청자들을 가스라이팅 하고 있는 셈이다.
저렇게 평생을 자기 오류의 덫에 빠져
진정한 교감을 나누지 못하는 M의 삶이
한편으론 안쓰럽다.
전혀 자기 객관화가 되지 않는 M이
과연 바뀔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M을 둘러싼 견고한 유리 벽을
아무도 깨트려 줄 수 없다.
그 누구의 말도 새겨듣지 않으니까.
스스로 깨부수고 나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똑 부러진 그의 말투를 빼닮은
그의 글투도 바뀌지 않을 거다.
제 딴엔 굉장히 논리적이고 호소력 있으며,
매력적인 글투라고 확신에 차 있으니까.
사실 글투만 바꾼다고 해서 될 일인가.
한 사람의 옷이 다른 옷으로
홱홱 바뀌는 마술쇼는 봤어도,
하나의 옷에서 다른 사람으로
홱홱 바뀌는 마술은 못봤다.
글투 기저에 있는
그의 생각과 관점이 변화의 포인트다.
# M에게...
언젠간 M이 자신의 결점을 마주하며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으면 좋겠다.
허허,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나라고 뭐 다 잘 할 수 있나?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해시키려 말고
혹시 다른 생각이 있는 건지
물어봐 줬으면 좋겠다.
내가 파악한 것은 여기까지인데,
당신 생각은 어떻소?
마지막으로,
문장의 완벽성에서 자유로워지면 좋겠다.
그 문장의 빈틈에서 사람 냄새가 올라오면 좋겠다.
문장, 글, 일, 사람, 인생...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완벽할 수 없다는 걸,
꼭 알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