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자기 말투를 바꾸라고? -
# 답답한 글투
Y로부터 온 답장은 이러했다.
고쳐준 글에서 좀 더 보강을 했으니
다시 검토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뭘 얼마나 보강했는지
문서를 열었다. 실소가 나왔다.
보강이 아니라
원상 복귀되어 있었다.
내가 고쳐 준 내용에서 표현이 맘에 든
몇 구절만 차용하고
Y 특유의 말투로 다시 돌아가 있었다.
말을 빙빙 다시 꼬아 놨다.
내용이 다시 흐릿해졌다.
나도 질 수 없었다.
오기가 발동했다.
선명하게 글투를 다시 바꿔서
Y에게 메일을 보냈다.
Y는 내가 보낸 글에 또 손을 봐서
답장을 보냈다. 또 도로마이타불.
나도 다시 손을 봐서 보냈다.
하나의 글이 왔다 갔다 하며
핑퐁 게임이 펼쳐졌다.
투명한 수채화가 됐다가
선명한 유채화가 됐다가
흐릿해지다 선명해지다를 반복하며
글이 너덜너덜해졌다.
그러다 순간, 깨달았다.
이게 괜한 짓이구나.
내가 잊고 있었네.
하나마나한 걸 하고 있구나.
예전에도 Y가 쓴 글을 손 본적이
몇 차례 있다.
생각해 보니 그때도 이랬다.
나뿐 아니라 주위에서도
글이 올드하다는 지적을 했지만
결국 자기 글투로 다 돌려놨다.
그때는 자기가 쓴 거라고
애착이 남 달라서 그런가 보다 했다.
그땐 나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뭐 어쩌나. 자기 권력과 지위로
자기 글을 밀고 나가겠다는데.
그래, 당신 맘대로 하시오!
네 팔뚝 굵소!
결국 자기 스타일대로 할 거면서
수정을 맡기지나 말던가.
# Y의 화법
가만히 생각해 보니 Y의 글투는
말을 빙빙 돌려서 말하는
그의 화법과 똑같았다.
그는 항상 어떤 사안에 대해
자신의 생각이나 결정 사항을 말할 때
두리뭉실하게 말한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거다.
그래서 부서 회의가 끝나면
직원들은 이런 말을 자주 한다.
“그래서 Y가 하고자 하는 말이 뭐야?
“이걸 하라는 거야? 대체 뭘 하라는 거야?”
“원하는 요점이 뭐야?”
그의 불분명하고도 불확실한 지시에
직원들은 헛다리 짚을 때가 많다.
일 중간에 또는 일을 거의 완성할 때쯤
그가 원하는 게 이게 아니었다는 걸
안 적도 많다.
“그때, 이렇게 하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언제? 그건 그 뜻이 아니었는데…”
몇 번 당하다 보니, 말을 듣고 난 뒤엔
Y의 의도가 무엇인지 묻는 버릇이 생겼다.
제가 말을 잘 이해했는지
확인차 묻는데요.
지금 행사 컨셉이 제대로 안 잡혀서
작가들은 글 작업이 어렵다고 하는 상황인데,
그래도 글로 좀 풀어놓은 걸 봐야
뭘로 행사 컨셉을 잡아야 될지
감이 잡힐 것 같다는 생각이신 거죠?
결론적으로 원하시는 건
우선은 작가가 생각하는 컨셉대로
대본을 써왔으면 좋겠다는 거죠?”
Y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렇게 매번 콕콕 집어서 되물어야
헛다리 짚는 걸 방지할 수 있으니...
사실은 회의를 통해 컨셉이 잡힌 후에
글 작업이 되는 게 순서다.
근데, Y가 자기 편의에 맞게
일을 거꾸로 하려는 것에
작가들이 문제 제기를 하자
말을 자꾸 빙빙 돌리고 있는 거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지 직접적으로
물어본 거였다.
저리도 의사소통이 안 되는데,
업무 소통이 원활하겠는가?
Y가 왜 저런 식으로 대화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젊었을 때, 말실수 때문에
크게 혼난 적이 있나?
말과 관련한 어떤 트라우마가 있을 수도 있지만
오랫동안 일관되게 반복되고 있는
그의 행동으로 봐선
책임을 회피하려는 심리 때문인 거 같다.
확실히 A도 아니고, 확실히 B도 아니고
A와 B의 어디쯤인 것처럼 말하면,
나중에 A와 B 중 문제가 생겨 책임 소재를 물을 때
어디로든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책임을 물을 일이 생길 때마다
조직의 리더로서 Y는 자기 탓이라고 한 적이 없다.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하거나,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거나,
또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란 듯
모른 척한다.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게,
결코 자기 주관이 없어서 저러는 게 아니다.
글 수정하는 핑퐁 게임에서
양보 안 하는 거 봐라.
다만 자기 생각대로 강하게 밀고 나갔다가
일이 잘못되면 자기에게 책임을 물을까 봐
자기 생각이나 소신이 분명히 있는데도,
불분명하게 태도를 보이는 것일 뿐이다.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는 거다.
거참, 조직의 어른이 보일 행동은
아니지 않습니까?
뻘짓을 멈추고 Y를 찾아갔다.
"수정에서 손 떼겠습니다.
앞으로도 Y님이 쓴 글은
손대지 않겠습니다.
Y님의 글투와 제 글투는
성향이 너무 다릅니다.
글을 제게 맡겼을 때는,
당연히 제 글투로 바뀌지 않을까요.
근데 제가 수정을 해 놓으면,
당신의 글투로 바꿔 놓으시는데,
Y님 글투로 수정하길 바라시는 건가요?
그럼 전 수정 못합니다."
"저한테 지금 글투 고치라는 건
제 말투 고치라는 것과 똑같습니다.
제 말투로 말하실 수 있겠어요?
힘드시잖아요.
그것과 똑같습니다.
Y님은 평상시에 말로 상대에게 상처 줄까 봐
또는 말로 오해를 살까 봐
말을 직접적으로 못 하시고
에둘러 말하시는 편이시잖아요.
Y님은 그러한 Y님의 화법처럼 글을 쓰세요.
근데 아시다시피, 제 말투나 글투는
이건 이거다라고 직접 말하는 스타일이잖아요.
그러니 Y님과 저는 당연히 안 맞을 수밖에요."
"저는 Y님의 말투로 바꿀 수가 없어요.
그래서 Y님의 글투로 수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 글투를 포기 못하시겠으면,
본인이 수정하시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
사실 글투가 이게 맞다, 저게 맞다는 없죠.
다 선호하는 스타일이란 게 있으니까요.
그리고 누군가는 이런 제 직설적인
글투가 불편할 수도 있는 거고요.
지금 Y님이 그러신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