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단상]
널 처음 만난 건 2006년이었지.
당시 일본에서 건너온다고 한 달을 기다렸던 것 같아.
야마하 디지털 피아노 중에서
고심 끝에 골랐던 너였어.
야마야, 18년을 내 곁에 있었더구나.
있을 땐 몰랐는데, 널 보내고 나니 가슴이 아려.
단 한 번도 고장 없이 내 손에 놀아주던 너였는데,
아직도 멀쩡한 너를 이렇게 보내게 돼서 미안해.
널 데려갈 수 없는 내 사정을 이해해 주길 바랄 뿐야.
야마야, 네 눈엔 내가 어떤 모습으로 남았을까.
지난날 네 곁에서 웃었고, 또 울었고,
나의 인생 서사를 모두 보여준 것 같아.
그걸 어떻게 아냐고?
널 떠올리면, 네 곁에 함께했던 내 모습도 떠오르거든.
20대 때는 너의 녹음 기능을 한껏 활용했지.
작곡하겠다고 허구한 날 녹음 버튼을 눌러대며,
혼자 흠뻑 취한 멜로디를 녹음하고 듣고,
녹음하고 듣고를 무한 반복했지.
그때는 뭐가 그리 하고 싶은 게 많은지
열정 충만했던 앳된 내 모습이 떠올라.
직장 때문에 전라도에서 경기도로 이사했을 때
널 데리고 올라온 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어.
처음 고향을 떠나 모든 게 낯설고 울적했는데
네 건반을 두드리고 나면
내 마음을 좀 다독일 수 있었어.
집값이 비싼 경기도 생활은 참 녹록지 않았지.
이사를 많이 다녀야 했는데,
일반 디지털 피아노보다 곱절은 무거웠던 널
항상 데리고 다녔어.
이불 하나 펴면 다였던 코딱지만 한 방에도
널 꾸역꾸역 밀어 넣었던 게 생각나.
누가 봐도 피아노가 자리하기엔
모자란 평수인데도 개의치 않았던 것 같아.
당연히 내 옆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널 팔거나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어.
산 꼭대기 동네로 이사할 때도
시 외곽으로 이사할 때도
널 살뜰히 챙겨 다녔어.
예전만큼 건반 두드리는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어도
널 정리할 생각은 한적 없어.
어느 순간부터 넌 내 곁에
당연히 있어야 되는 존재가 돼있더라.
넌 나의 일부가 되었고,
내 역사가 된 거야.
널 당근에 내놓고도
네가 팔리지 않길 바랐어.
누가 가격 흥정이라도 하면
절대 깎아줄 수 없다고 고집도 피웠어.
다른 물건을 팔 때는
척척 잘 깎아주면서 말이야.
하지만 이렇게 미루다간
널 정말 말도 안 되는 헐값에
너의 가치도 모르는 자에게 넘기게 될까 봐
조바심이 생기더라.
이 집이 곧 공매에 부쳐질 건데,
바로 집을 빼야 되는 상황이 오면
할 수 없이 고물상이나 중고상에게
너를 넘겨야 되니까.
그럼 너의 최후가 너무 초라해지는 것 같아서.
다행히도 그전에
널 보고 좋아하는 고객이 나타났어.
딱 봐도 서로를 아껴주는 사이좋은 중년 부부더라.
처음엔 부부의 아이가 치는 건 줄 알았는데,
부인이 칠 거라고 했지.
교양이 있어 보이는 부인은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자기가 아는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일본에 살 때 쳤던 피아노가
너라며, 단번에 너의 가치를 알아봤지.
좀 안심이 되었어.
비유가 과할 수도 있겠지만
마치 네가 좋은 양부모를 만난 듯했어.
하지만 이제 널 떠나보내는
내 마음은 착잡해지더라.
바로 널 가져가겠다고, 차에 싣기 용이하게
너의 몸을 하나하나 뜯어내는데,
내 일부가 뜯겨 나가는 것 같더라.
내가 힘이 없어, 널 지켜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자괴감이 들더라.
고객은 어쩜 이리 관리를 잘했냐며
좋은 값에 좋은 피아노를 구해 행복한 표정이더라.
관리 잘 된 피아노를
내가 무슨 사연으로 팔게 됐는지
저 고객은 모르겠지만,
차라리 너에겐 잘됐다 싶었어.
내 불운 곁에서 네가 온기 없이
방치돼 있는 것보다야,
행복에 젖은 손길이 널 어루만져 주는 게
백 번 나으니까.
내가 전세 사기를 당해
몇 년을 힘들어하는 동안
넌 나의 모든 걸 지켜봤을 텐데,
아니 내 18년 인생을 다 봤을 텐데,
네가 떠나는 당일에야
난 처음으로 네 속을 들여다보게 됐어.
건반부 아래 밑으로 그 밀실에
스피커가 양쪽으로 두 개 달려있는 것도
처음 봤지.
기분이 묘하더라.
어째서 나의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의 속을
이제야 처음 들여다보게 됐는지.
나 자신이 미련스럽고
너에게 죄스럽더라.
순간, 너에게 한 이 같은 실수를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어.
참 내 곁을 오래도 지킨 너였는데,
나야말로 너의 가치를 제일 못 알아본 게 아닐까?
생각할수록 미안하다.
지금은 너를 보내고도 실감이 나질 않아.
문득 너의 빈자리가 느껴지면
눈물이 날 것 같아.
왜 늘 항상 소중한 걸 잃고서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되는지…
야마야, 그동안 고마웠어.
늘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내게 건넸던 위로와 울림을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없는 형편에서도 비싼 자부심이 되어 주었던
너의 듬직한 자태…
마음 가눌 때가 없어 건반에 잠시 기대면
부드럽게 감싸주던 너의 고운 목소리…
어떻게 잊을 수 있겠니.
내 친구 야마야,
내 새끼 야마야,
잘 가…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