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단상]
비정기적으로
나만의 새드 페스티벌이 열린다.
다른 사람은 들어올 수 없는
오직 나만의 축제다.
이 기간엔 한없이 슬픔에 빠져
많은 것들을 안쓰러워하고 동정한다.
꼭 어떤 큰 사건이 벌어져서 생기는
단순한 감정 변화가 아니다.
물론 세월호 같은 비통한 참사에는
그로 인한 슬픔과 우울의 형태가
명백히 드러나지만,
평소에 크고 작은 사고가 없더라도
발생하는 슬픔엔 뚜렷한 형태가 없다.
모든 것에 대한 범인륜적인 감정이다.
‘세상, 참… 어쩌다가...’
‘사람, 참… 가엾다.’
‘모든 게… 불쌍하다.’
오히려 주위에서 놀랄만한 사건이
내게 벌어졌을 땐 냉담하다.
가령, 집에 도둑이 들었다든지,
교통사고가 났다든지.
‘이런 불행한 일이 내게만
안 일어나리란 법이 어디 있나?’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생길 수도 있지.’
충격에 대한 방어기제인가?
주위에서 더 놀라며 날 걱정할 때,
객관적으로 날 바라본다.
이미 일어난 사건과
나를 분리해서 보는 거다.
‘일어난 건 돌이킬 수 없는 거고,
그래서 이제 내가 뭘 해야 하지?’
이렇게 자신에 대해선
시니컬한 사람이,
세상과 인간에 대해선
새드 페스티벌을 열다니…
아이러니다.
분명한 건, 우울증은 아니다.
우울증이라면 갈비를 뜯으면서
족발을 생각할 순 없다.
먹고 싶은 게 그리 많을 수 있을까.
그리고 전문 심리 검사에서도 판명 났지만
난 기질 자체가 낙천적이다.
그런데 어쩌다, 왜,
새드 페스티벌이 열리게 된 걸까?
언제부터 열렸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의 기분만 떠오른다.
아주 오래전 언젠가…
슬픔의 큰 덩어리가
내 가슴에 막 파고들던 그때,
불행한 감정인 줄로만 알았다.
우울한 기분이 드니까
내 정신에 병이 든 건가 싶어 불쾌했다.
이후로도 때때로
슬픔 덩어리가 굴러 들어왔는데,
세상과 사람을 애도하다 보면
잔뜩 힘주며 지냈던 뇌와 마음에서
힘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가슴에 전기가 흐르듯 저릿저릿하며,
울렁거림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반복한 후에는
세상과 사람을 보는 시선이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그때부터 이게 불행한 감정이 아니란 걸 인지했다.
세상과 사람을 동정하는 나의 슬픈 아픔이었다.
그래서 명명했다.
살다가 보고 겪은 문제들과
갈등의 찌꺼기가 축척됐다가
페스티벌의 재료로 쓰이는 것 같다.
그저 슬픔을 즐기는 축제다.
마음껏 슬퍼하고 동정하다 보면
좀 더 이해하고,
좀 더 용서하게 되는 기분이다.
페스티벌의 주제와 내용이 이러할진대
어떻게 공개적으로 축제를 홍보하겠나?
누군가에겐 건방져 보일 수 있다.
네 주제에 누가 누구를 동정하냐며.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나의 동정 대상자에겐
무례한 일이 될 수 있고
불쾌한 일이 될 수 있다.
나만의 새드 페스티벌은
어쩌면 주제넘은 짓이다.
그래서 티 내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축제를 열 수밖에.
아니 엄밀히 따지면
나의 의지로 열리는 축제가 아니다.
누가 내 안에서
축제를 강제하는지 알지 못한 채,
별안간에 열리면
참여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축제의 기원을
드디어 깨닫게 됐다.
내 힘으론 헤쳐 나가기가 벅찬 현실.
그에 대한 무력감과 체념에서 비롯된 거였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분노와 실망을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다루고 있었던 거다.
아무리 화를 내고 아우성쳐도
극복할 수 없으니,
불쌍하게라도 여겨 현실을 수용하려는 나.
이게 새드 페스티벌의 진짜 목적이었다.
실상은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축제였던 새드 페스티벌.
다른 이를 애도하는 듯 치장해서
나를 애도하고 있던 거라니.
자신을 속일 만큼 영특한 인간의 특성이
감탄스럽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 속임수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같기도 해서
안쓰럽다.
어쩌면 모두가 저마다의 스토리와 이유로
자기만의 새드 페스티벌을 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단순한 우울증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날 더욱 불행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축제를 없애는 것에만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근본을 들여다봐야 한다.
고통과 아픔으로부터 스스로를 치유하고
현실 인지를 바탕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하려는
성장통 같은 우울증인지,
아니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되는
병리적 우울증인지.
다행이다.
나의 새드 페스티벌은
병리적 우울증이 아니고
불행한 게 아니라서.
이젠 늘 새드 페스티벌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