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인, 조직을 만나다 -
# 직장 체험기를 열며…
거의 인생의 절반을 직장에서 보냈으니
‘직장 인생’이라 할만합니다.
가족보다 더 많이 보는 관계가
직장 동료들과 상사이니 말 다했지요.
네? 애사심이요?
네. 애정만큼 하고 싶은 쓴소리도 많습니다.
직접 경험하며 깨달은
조직과 인간에 관한 나의 작은 고찰입니다.
# 조직 속으로 들어간 개인
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지난 직장 생활을 되돌아보며 나를 되돌아보았다. 처음 입사했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은 부분에 있어 다른 사람이다. 군말 없이 일했던 사람이 성깔머리가 사나워진 사람이 되어 있다. 나 자신은 불합리와 비효율에 맞서 비판적인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동안 날 지켜봐 온 상급자 눈에도 그리 보일까? 시키는 대로 일을 곧잘 하던 것이 점점 머리가 커지더니 불평불만이 많아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나의 변화에 회사는 무엇을 얻었고, 무엇이 불편해졌을까?
먼저 회사가 얻은 이득이라면, 15년 전 아무것도 모르던 새내기 직원이 이제는 맡겨진 프로젝트를 나름 잘 해내게 되었다는 거다. 하지만 이렇게 제 밥그릇은 지킬 줄 아는 직원을 얻은 대신, 맘대로 부릴 수 있었던 직원을 잃었다. 과거엔 밀어붙이기 식으로 일 맡기기가 수월했는데, 지금은 나의 눈치를 많이 보게 됐다는 점. 이유는 직원인 내가 까다로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까다롭게 구는 직원을 해고할 수도 없다. 그 누구로 쉽게 대체할 수 있는 업무가 아니고 대체할 만한 직원을 구하기가 녹록지 않다. 내가 이 점을 무기로 사용하여 비겁한 행동을 하는 건 결코 아니다. 지금부터 풀고자 하는 이야기는 내가 왜 까다롭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에 대해서다.
나의 직장 인생을 되돌아보니 조직이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 그리고 개인이 조직에게 끼치는 영향이 분명히 보였다. 개인과 조직은 얽히고설켜 동지가 되기도 하고, 적이 되기도 한다. 프로젝트는 개인플레이가 효율을 높일 때도 있고, 조직 플레이가 효율을 높일 때도 있다. 바로 여기서 리더의 자질이 요구된다.
# 조직 속 리더의 역할
리더는 프로젝트에 따라 개인플레이가 나을지, 조직 플레이가 나을지 상황을 판단하여 일 조직을 구성하고 프로젝트 성격에 알맞은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어야 된다. 그리고 팀원들 간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관계를 잘 조율해야 되는데, 리더가 지혜롭게 판단하지 못하면 직위나 업무 능력이 더 높거나 처세술에 능한 직원에게 더 힘을 실어줄 수 있다. 이때 보호받지 못한 약자는 리더뿐 아니라 조직에 대한 신뢰를 점차 잃어가게 될 거다.
문제를 단면이 아니라 다면으로 두루 볼 줄 아는 리더의 혜안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현장에서 느낄 때가 많다. 이해관계가 다른 개인과 조직이 서로 맞물려 유기적으로 잘 돌아가도록 관리하는 일이 리더의 본업무이다. 하지만 이 역할조차 모르는 리더가 현장엔 의외로 많다. 그러니 실무자의 역량과 권한을 무시하고 실무에 쓸데없는 참견을 내뱉는다. 오히려 이게 리더의 일인 줄 안다.
개인과 조직이 서로 연합하여 낼 수 있는 가장 큰 시너지는 개인의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조직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 그렇게 되면 개인은 조직을 더욱 신뢰하게 될 테고, 탄탄해진 조직력은 개인의 그것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업무 성과를 더욱 끌어올릴 거다.
조직은 있는데 개인은 없다?
하지만 조직은 있는데 개인은 없는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 개인이 있기에 조직이 있다는 근본을 잊으면 나 같은 까다로운 개인이 출현하게 되는 거다.
# 자유 전자적 속성을 지닌 사람
나는 애초에 조직 사회와는 맞지 않는 사람인가? 프리랜서로 일했다면 어땠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봤다. 내 속성에 대해 더 면밀히 알아보자 해서, 타고난 기질을 파악하는 TCI 심리 검사도 했다. 어느 정도는 내가 예상했던 내 모습이었다. “남의 평가나 비판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중요성을 과대 평가하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며, 목표를 위해 혼자 노력하는 일에 그다지 외로움을 느끼지도 않는 강점이 있는 반면, 자신의 의견이나 욕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기분이나 입장을 배려하는 면이 부족해서 도전적 혹은 반항적인 느낌을 줄 수 있다”라고 상담사가 결과지를 풀이해 줬다.
결과가 설명해 주듯 나는 혼자 몰두해서 일을 즐기는 성향이라 직업상 기획이나 글쓰기가 적성에 맞다. 책 ‘피플웨어’의 설명에 의하면 나는 자유 전자적 속성을 지닌 사람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동기 부여를 할 수 있고
현실적으로 자신이 일하는 방향을
자신이 설정할 수 있어야 그것은 잘 될 수 있다.
뛰어난 관리자의 지표는 바로 균형 잡힌 시각과
성숙함을 갖추고 있는 중요한 몇몇 인물들을
뽑아서 그들이 자유롭게 일하도록 풀어주는
능력에 달려 있다.
그런 관리자는 자유 전자적 속성을 타고난
사람들에게는 어떤 지시 사항도
내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들은 상부에서 내리는 지시보다는 바로
자신이 세운 방향에 따라 일을 추진하는 것이
훨씬 더 회사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일을 해왔던 것이다.
이들이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어야 할 때이다.”
상담사는 마지막으로 내 기질과 성품에 대해 정리해 주며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반항아 기질이 나오게 될 거라고 말했다. 순간 내 모습이 팍 떠올라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직장에서 반항아 기질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지금으로부터 6년 전. 2018년도부터 반항아 기질이 밖으로 새어 나오기 시작했는데, 2009년 입사로부터는 9년 뒤의 일이다.
9년간 찍소리 없이 일을 잘해오다가, 왜 어느 날 반항심이 튀어나왔을까?
그날 처음으로 파업을 선언했다. 사회적인 파업 활동을 벌인 게 아니라 상급자 앞에 나아가 "여기서 멈춰야겠다. 더 이상은 못하겠다"라고 바보같이 상급자 앞에서 울면서 소리친 거다. 처음 보는 내 모습에 상급자는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고, 더 놀란 건 내 자신이었다. 나도 내가 이럴 줄은 몰랐으니까. 처음 보는 내 모습에 나도 당황스러웠다.
# 눌러진 용수철은 언젠가 튀어 오르기 마련이다
번아웃이 왔다. 특정한 날에 의도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그동안 계속 눌러온 내 안의 용수철이 나도 모르게 튀어 오른 거다. 일주일인가, 이주일인가를 쉬면서도 불안해했다. 이렇게 쉬어도 되냐면서 쉬는 것도 불안해하는 워커홀릭이었다. 그때부터 찬찬히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조직에서 누구이고,
조직은 내게 무엇일까?
나는 조직에서 무엇을 위해 일하며,
무엇을 원하는가?
조직은 내게 유용한 것인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며 생각을 거듭하니, 나는 조직에서 일하는 기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럼 이것은 조직의 잘못인가? 내 개인의 잘못인가? 아니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게 있을까? 노동 시장에선 노동력이 곧 상품이니 냉정히 말하면 노동자는 일하는 기계가 맞다. 인간적으론 서운할 수 있으나 직장은 친목 도모회가 아니다. 인간 자체보다 인간에게서 뽑아내는 노동력이 더 중요한 곳이 직장이다. 그렇다면 노동의 가치를 기준으로 잘잘못을 따져 보자. 모두의 잘못이었다. 조직의 비효율과 비합리성, 그런 조직의 무능함에도 나를 갈아 넣고 있었다.
이를 분간 못한 나도 무능했던 거다. 개인이 조직을 만나면 자아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한 적 없으니까. 개인이 유능한 조직을 만나면 자기 효능감이 높아지는 유능한 개인이 될 확률이 높아질 수 있지만, 유능한 개인이 무능한 조직을 만나면 그 파괴력이 가히 작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됐다. 개인이 조직을 만나기 위해선 무엇을 고려하고 만남을 결정해야 되는 것인지 입사 9년 만에 생각하게 됐다. 그동안 성과에 눈이 멀어 잘 보이지 않았던 조직의 문제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