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울렁증

멀리 오래 보기

by 정물루

요즘엔 간단히 수다를 떠는 느낌의 스레드를 자주 하는데, 아무래도 ‘해외 생활’ 관련 콘텐츠들이 자주 내 피드에 보인다. 그중에서도 외국에 살지만 사실은 영어가 힘들다는 하소연을 꽤 자주 보게 된다. 외국에 살거나 남편이 외국 사람이면 당연히 영어를 잘하겠거니 생각하지만, 현실은 늘 그렇지만은 않다.


두바이에서도 해외에서 십 년 넘게 살았거나, 남편이 외국 사람인 한국 친구들이 많다. 그들의 영어는 미국 교포 정도일 거라 짐작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해외에서 오래 살아도 한국 교회, 한국인 동호회, 골프 모임만 다니고, 물론 메이드와 대화하거나 물건을 살 때는 영어를 쓰지만 짧은 단어로만 소통해도 웬만한 일들은 다 해결되는 듯하다. 직장인의 케이스는 다르겠지만, 특히 주부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남편이 외국인인 친구들의 영어 역시 우리가 상상하는 ‘미국 교포의 영어’와는 거리가 있다. 한국인 발음이 강한 경우도 많다. 사실 이런 경우, 그들의 남편을 만나보면 한국어를 굉장히 잘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에서 만나 결혼한 케이스라 부부 간 한국어 소통이 가능했고, 영어도 쓰긴 하지만 대부분 섞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 유럽이나 다른 나라의 언어까지 섞이기도 해서, ‘영어’만 놓고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네이티브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한국에 살아도, 외국에 살아도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영어는 평생의 숙제인 듯하다. 나는 중·고등학교를 홍콩에서 보냈고, 지금은 두바이에서 13년 넘게 살고 있다. 회사도 다녔고 지금도 일을 하고 있고, 남편도 외국인이라 영어에 노출된 정도로만 보면 꽤 높은 편이다. 아이들과의 대화도 영어가 메인이다. 넷플릭스 K-드라마를 통해 한국어를 배운 우리 딸은 내가 하는 말의 80% 정도는 알아듣는다. 대답은 영어지만. K-컬처에 관심 없는 우리 아들은 내가 한국어로 말했을 때 20% 정도만 알아듣는 듯하다. 그리고 우리 남편은 한국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전, 우연히 나를 만났고 내가 이미 영어를 하고 있었기에 한국어 공부가 절실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나조차도 항상 영어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다. ‘영어를 잘한다’는 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어느 정도 해야 정말 잘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유튜브나 TV에 나와서 술술 이야기할 수 있으면 영어를 잘하는 걸까. 그렇다면 우리는 한국말로 유튜브나 TV에서 술술 말할 수 있을까.


이쯤 되니 더 이상 언어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문해력 혹은 특정 주제에 대한 지식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좋아하는 나는 매년 약 80-90권의 책을 읽는다. 영어책은 너무 예쁘고 제목도 귀엽고 종이 냄새도 좋아서 사긴 하지만,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한두 페이지 읽다 말고 한국어 책을 집어 들면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그렇게 읽다 만 영어책들이 내 책상과 책장에 차곡차곡 쌓여, 그 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작년에는 ‘빨리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하루에 조금씩이라도 읽어보자고 마음먹었다. 긴 호흡과 수많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 대신, 챕터별로 잘게 나뉜 이야기가 있는 책을 골랐다. 하루에 한 챕터라도 읽어보자. 어차피 병렬 독서를 하니 영어책은 이렇게 한 챕터씩 읽고, 읽고 싶은 한국어 책은 또 따로 읽으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읽다가 재미있으면 더 읽기도 했고, 2주에 한 권, 한 달에 한 권 정도의 속도로 읽어 나갔다. 그렇게 작년에는 영어로 된 책 16권을 읽었다.


한국어 책도 가볍게 술술 넘어가는 책도 좋지만,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책들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약간 도전적이고, 읽고 나면 성취감이 남는 독서. 영어책도 몇 권 읽고 나니 이제는 벽돌책이거나, 퓰리처상을 받고 자기만의 색이 강한 문장을 쓰는 작가들에게까지 관심이 확장되었다. 그리고 역시 번역서보다 원서로 읽었을 때 재미와 감동은 배가 되는 것도 알게 되었다.


늘 업데이트하는 내 리딩 로그를 보니, 1월에는 영어책을 두 권밖에 읽지 못했다. 물론 그중 한 권은 600페이지가 넘는 책이었다. 영어책은 빨리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어책과 친해지기 위한 것이니 괜찮다.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으니, 느려도 괜찮다.


올해 목표 중 하나는 그렇게 읽다 마는 영어책을 만들지 않거나 줄이는 것이다. 일 년에 한 30권 정도 읽어서 한국어 책과 영어책 사이의 간격을 조금 줄여보는 것. 이제 시작이지만, 내 영어도 조금 는 것 같다. 아니, 영어라기보다는 문해력이 늘었다고 말하는 게 더 맞을지도. 영어를 잘하고 싶으면, 느려도 천천히, 영어로 된 책 읽기 추천합니다.


image.png 요즘 청소년들 고전 읽고 리뷰하는 게 바이럴이라는데... 이 트렌드, 나도 슬쩍 올타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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