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이라서 다행입니다

국가란?

by 정물루

1팀 - 러시아

2팀 - (인도 출신) 영국

3팀 - 호주

4팀 - 영국

5팀 - 시리아

6팀 - (팔레스타인 출신) 레바논

7팀 - 레바논

8팀 - 한국 (나)


올림픽 이야기는 아니고, 예전에 다니던 회사 팀장들의 국적이다. 이들의 와이프나 남편의 국적까지 합치면, 구성은 훨씬 더 버라이어티해진다. 두바이 거주민의 약 90%가 외국인이라 모임이나 미팅에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이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주간, 월간으로 팀장 미팅을 자주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 팀장 미팅들 때문에 특정 국가에 대한 이미지가 고정관념처럼 굳어버린 건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그 나라 출신 사람들 중에서 내가 가장 자주 접했던 사람들이었으니까.


광고 회사라 비딩에 자주 참여해야 했고, 각 팀이 함께 일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보통 팀장들이 먼저 모여 스케줄과 컨셉을 정하고 브레인스토밍을 하는데, 그때부터 보이지 않는 텐션이 생기곤 했다. 한 번은 크리에이티브팀(제작팀)에서 컨셉을 공유했는데, 팀장 중 한 명인 영국 사람이 그 컨셉 키워드의 영어 표현이 이상하다며 “진짜 네이티브가 쓰는 영어가 아니다”라는 코멘트를 한 적이 있었다.


영국과 호주 사람을 제외하면, 우리 모두에게 영어는 제2외국어다. 이 말은 곧, 그들을 빼고는 전부 두 개 이상의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게다가 영어는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마다 조금씩 다르다. 영국 사람이 영어를 지적하자, 회의실 분위기는 단번에 싸해졌다.


더군다나 두바이는 영어가 기본 비즈니스 언어라, 레바논, 러시아, 팔레스타인 출신이지만 영어권 국가에서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 많다. 여기에 각자의 모국어 - 특히 외국인 중 다수를 차지하는 아랍어와 인도계 언어 - 가 섞인 ‘두바이식 영어’ 표현들도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언어는 그렇게 동시대의 문화와 삶이 스며들며 계속 변화한다. 그래서 더 흥미롭다.


아무리 두바이에서 오래 살아도 팀장 회의를 하면, 각자는 여전히 자기 나라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삶, 트렌드와 선호도. 그렇게 조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느새 익숙해진다.


전쟁 중이거나 정치, 경제적으로 불안해 쉽게 방문할 수 없는 나라 출신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만, 그리고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꺼냈다. 시리아나 레바논, 팔레스타인 출신 팀장들은 두바이 거주 비자가 있어도 해외 출장 때마다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고, 다른 나라 시민권을 얻기 위해, 그 마음이 늘 분주했다.


호주나 영국, 그리고 한국에서 온 나 같은 사람들과 그들 사이의 차이는 사실 태어난 지리적 위치뿐이었는데, 그게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든다는 사실이 참 불공평하게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공식적인 국가가 없어 여권조차 없는 팔레스타인 출신 팀장은 웃으며 와이프의 나라인 러시아에 입국할 때마다 겪는 에피소드를 들려주곤 했지만, 그 순간마다 얼마나 짜증 나고 불편했을까 싶었다.


레바논 사람인데 와이프가 영국인이라 아이들에게 영국 여권을 주고 싶지만, 이슬람법상 아이들은 아버지의 국적을 따라야 한다며 여권 변경 방법을 알아보고 있다는 친구도 있었다.


또 트위터에 정부 비판 글을 썼다가 시리아 입국 자체가 불가능해진 친구도 있었다. 입국하면 곧바로 경찰에 연행될 수 있어, 두바이에서 불과 3시간 거리인 고향에 발을 들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비교하게 되니, 한국 밖에서 살수록 애국심이라는 감정이 더 커지는지도 모르겠다. 한국 사람이라서 다행이고, 감사하다는 마음이 별다른 노력 없이도 저절로 생긴다. 내 여권이 한국 여권이라 다행이라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국가라는 개념이 한 사람의 인생에 이렇게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앞에서 생각하게 된다. 이 ‘국가’라는 개념은 과연 꼭 필요한 것일까.


IMG_3434.HEIC 그래도 볼 때마다 감사한, 내 여권 첫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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