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향음주례(鄕飮酒禮)
"한국 사람들은 왜 손을 겨드랑이에 끼고 술을 마셔?"
"풉. 무슨 소리야? 손을 겨드랑이에 끼는 게 아니고 누가 술을 따라주면 두 손으로 받고 고개를 살짝 돌려서 마시는 거야. 보통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랑 술 마실 때 그렇게 하지."
"아, 그럼, 같이 술 마시는 사람 나이는 어떻게 알아?"
"아니, 같이 술 마시는 사람 나이도 모르고 술을 왜 마셔?"
라고 말하고 생각해 보니, 외국인 친구들의 나이를 모르고 같이 술을 마신 적이 많았다. 그러면, 우리 한국 사람들은 상대방의 나이를 무조건 안다는 건데, 이 상황도 멀리 떨어져서 보니 독특하다.
한국에는 집안 어른들이나 직장 상사, 또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과 술을 마실 때 으레 지켜야 할 '음주 예절'이 있다.
1. 술을 양손으로 받기
어른이 술을 따라 때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술잔을 두 손을 들고 받는다. 혹은 다른 손으로 잔을 든 팔을 받치고 받는다. (외국인 남편 눈에는 겨드랑이에 손을 끼고 받는 것처럼 보인 듯.)
2. 술잔 비었을 때 따라주기
다른 사람들, 특히 어른의 술잔이 비었을 때는 (눈치껏 알아차리고) 술을 따라드려야 한다.
3. 고개 돌려 마시기
어른이 같은 테이블에서 함께 술을 마실 때는 고개를 살짝 돌려서 마셔야 한다.
4. 자작 피하기
자기 잔에 직접 술을 따라 마시면 함께 마시는 사람들에게 'Bad Luck'이라는 통념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따라 주지 않는다면 눈치를 줘서 내 잔을 채우게 한다.
5. 원샷하기
어른들과 건배를 하고 원샷을 하지 않고 홀짝 조금만 마시면 무례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물론 맥주나 막걸리 같은 양이 많은 술은 제외.
내가 알고 있고 현대까지 어느정도 지켜지고 있는 '음주 예절'은 이 정도인 듯하다. 그런데 이 예절들을 지키려면 전제는 상대방의 나이를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남편 친구들과 술을 마시기 전에, 그 친구 몇 살이냐 와이프는 몇 살이냐 물어봐도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 이런 예절은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의미가 없다.
한국 드라마를 볼 때, 이 여섯 가지 예절들을 지키며 술을 마시는 장면이 왕왕 나온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한국 사람들은 정말 매너도 좋고 남을 존경할 줄 안다며 감탄하다. 그러면서 꼭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근데 상대방 나이는 어떻게 다 알아?"
한국의 이런 음주 문화는 생각보다 역사가 길었다. 세종대왕은 향음주례(鄕飮酒禮)라는 예법을 만들었고 향교와 서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게 했던 육례(六禮) 중 하나라고 한다. 단순히 술을 마시는 게 아닌, 어른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예의를 차리면서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술을 마시는 매너 뿐만 아니라, 단정한 의복부터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 깨끗한 그릇, 말하는 태도까지 술자리에서의 어른, 주인, 손님의 자리까지 규정한다.
어쩌면 한국에서의 술을 함께 마신다는 의미는 외국에서의 술자리와 그 오리지널리티가 다를 수도.
마치 교양있는 차도(茶道)처럼, 진심으로 술을 대했던 우리 조상님들의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외국인들이 체험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나 쇼룸이 있으면 재미있을 듯하다. 당연히 입장할 때 나이 신고는 필수 조건이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