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아들을 데리고 시댁에 갔다. 오예~를 외치며 맥주 세 캔을 원샷했다. 설거지거리, 빨랫감은 한가득이고 바닥은 엉망이었다. 어제꺼부터 널려 있었다. 그래. 우리 싸웠다. 싸우고 남편은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버렸다. (자주 좀 부탁해.)
남편이 무심코 툭툭 던지는 말들이 참 싫다. 남편은 왜 말을 안하고 꽁해있냐고 답답해한다. 나는 분명히 싫다고 말했는데 짜증난다. 그리고 바로 2차싸움이 시작된다.
아기가 열이 났다. 낮잠자고 안아주는데 몸이 살짝 뜨거웠다. 얼굴에는 열이 없길래 그냥 뒀다. 외출까지 하고 왔다. 놀이터에서 실컷 놀아주고 들어왔다. 남편도 퇴근했다. 아기 열난다고 체온을 쟀다. 39.8도. 뜨악. 정말 열이 났구나. 그런데 왜 나는 아기 얼굴이 차다고 느껴졌지?
.....37.8도. 내 몸에서도 열이 나고 있었다.....
"너가 아픈줄도 모르고 엄마는 짜증을 냈구나."
"그러게. 엄마도 아파서 몰랐네."
아기랑 잘 놀다가 남편퇴근해서 저녁준비하는데 아기가 칭얼거렸다. 여태껏 놀아줬는데 칭얼거리니 짜증이 났다. 남편이 한 말이 거슬렸는데 계속 그 말을 반복했다.
"엄마는 애가 아픈 줄도 모르고 칭얼거린다고 짜증내고."
"그만해. 아까도 말했잖아."
"알았어."
알았다 했으면 그만 좀 하지 저녁까지 말만 바꿔서 계속했다.
"엄마는 맨날 짜증만 내지이~"
"아 그만 좀 하라니까!"
남편아들 간식 대령하고 거실에 앉았다. 남편이 아기 손톱깎이를 가져오라고 했다. 나도 이제 앉은 거라 일어나기 싫다고 했다.
"움직이는 양에 분명 차이가 있어. 나는 평소에 잘 움직이니까 살이 안쪄. 너랑 나랑 움직이는 양 두배정도 차이나는 것 같아. 너는 집안일도 안하잖아."
"내탓하는 말좀 하지 마라니까!!!!!!"
여태 집안일 하고 이제 좀 쉬려는 사람한테 그게 할소린가. 남편이 그런식으로 말하면 참 싫다. 말과 행동 그 이전에 "뉘앙스" 라는 것이 있다.
'집안일도 안하고 아기한테 짜증만 내고 안움직이니 뚱뚱하고 그런데 맨날 돈만 쓰려하는 사람'
이라는 뉘앙스를 말로 감싸서 팍팍 풍긴다.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니라고? 내가 예민한거라고? 사실아니냐고? 콱그냥. 내가 해준 밥 먹고 내가 빨아준 옷 입고 내가 정리해 놓은 집에 앉아서 일 안한다고 지껄이는 것도 참 싫지만 그보다 더 싫은 건, 남편에 대한 콩깍지가 벗겨지는 내 눈, 남편에게 가졌던 존경심이 사라지는 내 마음이다. 남편이 참 할일없어 보이고 못나 보인다.
'남자가 할일없이 간섭이나 하고. 피곤하면 들어가 쉬든지 매경 밀리지나 말고 읽을 것이지. 아기 어린이집 가니 나혼자 노는줄 아나보지? 누가 시어머니 아들 아니랄까봐.'
아기 어린이집 적응기라 한시간씩 내 시간이 생겼다. 등산을 하니 가방하나 사고 싶어졌다. 정말 필요한 것은 아니라 그냥 애교스럽게 말해봤다.
"봄가방 하나 갖고 싶다."
"은행가서 1억정도 대출 좀 알아봐."
아침부터 사람 찝찝하게 하더니 저녁에 또 시작했다.
"앞으로 너 뭐 사는 것마다 태클 걸거야."
이런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 참 김빠지게 한다. 가방 안사준 거야 별일 아니지만 내가 평소에도 쓸데없는거 잘산다는 뉘앙스를 풍기니 화가 났다.
생활비, 식대를 받아서 생활하는데 솔직히 부족하다. 이래저래 껴맞추고 줄일거 줄이고 겨우 생활비를 맞춰놨다. 이번달에는 영양제도 사보고 견과류도 추가했다. 적은 생활비로 해낸것이 내심 뿌듯했다. 그런데 저런 소리나 하니 욕이 절로 나온다.
아기 재우고 밤늦게 설거지를 하다 행주를 던져버렸다.
"에이~씨ㅇ. 드러워서 진짜."
안방에서 티비보던 남편이 나왔다. 무슨일이냐고 했지만 대꾸도 안했다.
"나때문은 아니지?"
"..."
"혼자 있고 싶어?"
"..어. 말하기 싫으니까 그냥 들어가."
그러고 다음날 냉전했다. 아기는 낮잠자고 일어나서 계속 칭얼거렸다. 어제의 기분나쁨과 오늘의 어색함이 아기의 칭얼거림으로 폭발했다. 남편이 아기 데리고 나가버렸다. .저녁에는 올줄 알았는데 안들어왔다.
"생활비 반납할테니까 앞으로 저녁 먹고 들어와!"
"당신 빨래는 안할거니까 도우미 쓰든지 알아서 해! 생활비 몇푼준다고!!"
"내가 돈벌어도 당신보다 더 벌겠다. 집에서 살림이나 해봐 어디. 내가 한 것보다 깨끗하게 해놔."
혼자 막 씨부렁거리면서 맥주 3캔을 원샷했다. 온갖 상상을 마치고 한숨 깊게 내뱉었다.
재수할 때 사회선생님이 생각났다. 월 천 이상 버는 서울대 나온 강사였다. 그때 선생님은 서른 여덟 살이었는데 와이프랑 열세살 나이차이가 난다고 했다. 우리는 도둑놈이라고 놀렸다. 키도 작고 꾀죄죄한 차림새. 그래도 역시 남자는 돈과 능력인가 우리끼리 소근거렸다. 문득 그때 선생님이 한 말이 생각났다.
"저는 아침에 와이프한테 목욕물을 꼭 받아놓으라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뜨거운 물속에서 그날 할 일을 생각하고 정리하는 일을 꼭 합니다. 와이프가 일찍 일어나야 하고, 아침준비하느라 바쁘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저는 매일 반신욕을 합니다. 총각때야 사우나 다녔지, 결혼까지 해서 아침에 사우나 가는 건 낭비죠. 마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땐 남자가 돈많으니 어린 아내에게 저런걸 시킨다고 굉장히 싫어했다. 그런데 나는 왜 15년도 더된, 스쳐간 사람의 별스럽지도 않은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났을까?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남편 목욕물을 받아놓는 아내. 결혼하면서 남편의 요구에 의해 해온 것일 수도 있고, 남들이 보기에 좀 짜증나는 것일 수도 있다. 남이 뭐라고 하건, 남편이 미울 때건, 좋을 때건 매일 목욕물을 받는 모습이 그려졌다. 얼굴 한번 본적 없는 선생님의 아내, 그리고 나를 바라봤다.
스벅은 왠지 인증샷을 꼭 남기고 싶다.
나는 남편을 위해 한게 뭐가 있을까?
내 감정을 쏟아내고 나니 남편이 보였다. 밥차리는 것 말고, 집청소하는 거 말고, 빨래 하는 거 말고 오로지 남편을 위해 배려한 행동이 뭐가 있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남편도 퇴근하고 돌아와서 힘들텐데, 그래도 어쨌든 남편은 아기를 데리고 나가 나 혼자있을 시간을 주는데 말이다.
여동생의 천만원 사건 이후, 남편은 어쩌면 나보다 더 자존심이 다쳤을 것 같다. 남동생도 별도움 안되는 맏형보다는 빚갚아주고 돈잘쓰는 제부와 더 친하다. 여동생에 대한 질투, 혹은 돈을 적게 벌어오는 불만을 아기라는 방패막을 치고 내가 먼저 공격한건 아닐까.
하룻동안 나 혼자 있었다. 혼자자는 것도 결혼하고 처음이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자는 것을 무서워했는데... 맥주 3캔의 힘을 빌어 잠을 청했다. 아기가 없으니 백색소음도 안틀고 집이 너무 고요했다. 혹시 들어왔나 새벽에 한두번 깼다. 9시에 자서 아침 8시에 일어났다. 자다 지쳐서 일어났다. 개운하다기보다는 허리가 너무 아팠다.
아침에 요거트 대충 먹고 집을 나섰다. 1차 뚜레주르, 2차 올리브영, 3차 스타벅스, 4차 집앞 카페. 하루종일 돌아다니고 글을 썼다. 그렇게 원했던 혼자만의 시간. 시간이 지날수록 깨달았다. 텅빈 집에 혼자 들어가기 싫어 이카페 저카페 배회하고 있었음을. 나는 남편과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인들에게 감사편지를 쓰는데 정작 가까운 남편에게는 감사편지를 쓰지 않았다. 남편에 대한 감사를 매일 일기로 쓰기 때문에 더 소홀했나보다. 제대로 써서 남편 호주머니에 몰래 넣어놔야겠다. 나도 아침에 남편 목욕물 한번 받아볼까? 우쒸~ 나는 입욕제 하고 장미꽃도 뿌릴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