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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강스백 May 09. 2020

고기를 반품할 때의 마음가짐

흑돼지 에세이


한 달에 한 번씩 인터넷으로 고기 장을 본다. 오리고기, 닭가슴살, 소고기, 돼지고기 냉동실에 얼려두고 먹는다. 특히 제주도 흑돼지는 우리 집 최애템~!!!

고기는 그때그때 사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신선도도 그렇고 고기를 저장해 놓고 먹는다는 게 왠지 거부감이 들었다. 채식주의까지는 아니지만 뭔가 불편했다. 그런데 그렇게 장을 보려 하니 귀찮아서 고기를 안 먹게 되었다. 고기로 영양을 채우지 못한 남편은 짜증이 심해졌다. 내 느낌일지 모르겠지만.

인터넷 구매는 직접 보고 사는 게 아니라 고기의 상태를 보지 못하고 사는 단점이 있다. 몇 번 시행착오 끝에 고기 별로 괜찮은 구입처를 찾아냈다. 요즘 세상 정말 좋다. 좋은 고기를 신선한 상태 그대로 택배로 받아볼 수 있다니. 그것도 제주도 흑돼지를 집에서 먹을 수 있다니.

외식을 즐기지 않는다. 배달음식도 잘 안 먹는다. 가끔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러 가기도 하고 배달도 시켜먹지만 정해져 있다. 외식은 제주도 흑돼지, 배달은 치킨! 그래도 치킨은 더 자주 사 먹는데 흑돼지는 자주 먹기 힘들다. 비싸기도 하지만 아이와 가면 내가 맛있게 못 먹으니 안 가고 말아 버린다. 고민 고민하면 주문해 본 흑돼지가 괜찮아서 멜젓까지 레시피 보고 만들어 집에서 즐긴다. 월초라 기쁜 마음으로 고기를 주문했다.




몇 번 주문한 곳이라 부위별로 많이 주문했는데 삼겹살이 이상했다. 곰팡이는 아닌 것 같은데 초록색으로 뭐가 묻어 있었다. 부랴부랴 다른 고기들도 살폈다. 전지 부위는 괜찮았는데 삼겹살은 모두 저렇게 이물질이 있었다.

그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 인터넷 주문은 하자로 반품을 해도 마음이 불편하다. 귀찮기도 하고 이미 결제는 끝났는데 사업자가 괜히 우리 과실로 환불을 안 해줄지도 모르고... 특히나 신선도가 중요한 고기 종류는 누구 잘못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게다가 내일은 주말. 이 불쾌한 상황이 다음 주까지 이어질 것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하필이면 저녁에 택배를 받아서 업주와 바로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우선 사진을 찍고 사이트에 반품 신청을 했다. 예전 같았으면 전투준비로 밤새워 안 좋은 상황을 예측하고 계속 걱정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할 일은 사진 찍고 기다리는 일까지다. 미리 화내고 걱정하는 것은 엄청난 감정소비고 에너지 낭비이기 때문이다.

바른 사업자라면 과실을 인정하고 반품이나 교환을 해 줄 것이고 나쁜 사업자여서 내 손해가 생긴다고 해도 나만 손해보지는 않는다. 다시는 거기서 주문을 안 하면 되고 다른 좋은 곳을 찾아 떠나면 그만이다. 그곳은 다른 구매자에게도 똑같이 할 것이다. 나는 몇만 원 손해보고 끝이지만 그 사업자는 장기적으로 더 큰 손해를 볼 것이다. 굳이 내가 악플을 달지 않아도 스스로 망할 가게를 몇만 원 때문에 기분을 망칠 수는 없다.

다음 날 아침 이사라는 분에게 전화가 왔다. 그리고 바로 고기를 다시 보내준다고 했다. 이사님은 계속 죄송하다고 했고 나는 계속 감사하다고 했다. 사소하지만 솔직하게 과실 인정을 해주어서 정말 감사했다.

"고기는 전부 새로 보내드릴 거고 지금 받으신 고기는 폐기해주시면 되는데요. 고기 자체는 정말 좋은 고기라서요. 뭐 묻은 부분만 살짝 떼어내고 구워드 셔도 되긴 합니다."

통화 끝내면서 함께 웃었다. 저도 그러려고 했어요. ㅎㅎㅎ 나는 고기를 또 받는다는 기쁨과 제주도 흑돼지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이웃에게 이 사연을 말하고 받은 고기 한 덩이를 내어 주었다. 이렇게 인심을 쓰게 되네. 잘못 온 고기 덕분에 고기 파티하게 생겼다.


환불 못받을까 전전긍긍 하나 그냥 잊고 내할일 하나 결과는 똑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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