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또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끝은 또 다른 시작을 잉태하고 있다
어쩌면 여행자에게 있어 여행은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것일지도.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나를 향해 건너편 창가에 서 있던 줄리언이 말했다.
LC, 지금 눈 엄청 많이 내려! 너도 오늘 비행기 탄다고 하지 않았어?
어두 컴컴한 도미토리, 그 끝에 위치한 작은 창문. 창 밖의 세상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줄리언과 실비아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서둘러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걱정이 되는지 내게 말했다.
너도 공항에 빨리 가봐야 하지 않아? 뉴스 보니까 비행기가 못 뜰 수도 있다던데.
아, 그래야 할까..
마지막 날. 뉴욕의 하늘에서는 무겁게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최대한 늦게, 비행기 시간에 딱 맞춰 공항에 갈 생각이었던 나는 혼란스러웠다.
샤워를 끝내고 공용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며 머핀을 씹었다. TV에는 온통 눈 이야기였다. 리포터 뒤에서는 사람들이 눈을 치우고 있었다. 찌푸덩한 하늘에서 마구잡이로 떨어지는 눈. 우울했다. 거창한 무언가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뉴욕에서의 마지막 날에 눈 파티(Snow party)라니. 사실, 눈이 내려서라기보다는 2주간의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는 것이 더 슬픈 일이기도 했다.
도미토리 방으로 돌아갔을 때, 줄리언과 실비아는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비행기는 다행히 결항되지 않았다고 했다. 아르헨티나, 그들은 이제 몇 시간 후면 한창 무더울 고향에서 짧은 휴가를 되새길 것이다.
잘 가, 줄리언. 그리고 실비아.(웃음)
고마워 LC, 행운을 빌어!
침대에 누워 오늘 하려 했던 일을 생각해봤다. 오후 6시, 공항으로 가기 전에 잠시 기념품을 사러 월스트리트(Wall st.) 근처에 다녀올 생각이었고, 월스트리트로 가는 길에 5번가에 있는 '애플스토어(Apple Fifth Avenue)'에 들를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지난 2주간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특별히 많은 것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뉴욕에서의 모든 일정은 5번가에서 끝났다. 5번가 역(5 Avenue)에 내렸을 때 하늘은 무서울 정도의 눈을 퍼붓고 있었다. 애플스토어에 닿았을 때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테이블 위에 전시된 컴퓨터로 JFK공항의 항공기 스케줄을 확인하는 순간, 내 머릿속엔 오로지 빨리 숙소로 돌아가서 짐을 챙긴 다음 공항으로 가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JFK의 모든 비행편은 결항이었다.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었다.
맨해튼을 떠난 전철은 눈 내리는 퀸즈를 지났다. 온 마을에는 눈이 두텁게 쌓여 있었다. 도저히 비행기가 뜰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실감 났다. 공항에 도착한 나는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카운터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들을 수 있는 말은 '5일 뒤에'나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전의 모든 비행편 예약이 마감되었기 때문에 나는 5일 뒤 비행기를 배정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화창한 LA의 날씨. 나는 뉴욕에서 LA까지 간 다음 LA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한국으로 갈 예정이었다. LA를 출발하는 인천행 비행기는 예정대로 출발할 것이었다. 나는 카운터 직원에게 "혹시, LA까지 갈 수 있는 다른 비행편이 있냐"고 물었지만, 대답은 "No"였다. 지금 상황에서 비행기보다 빨리 LA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5일간 뉴욕 여행을 더 할 수 있게 됐으니 좋은 건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하는 나를 향해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의 한 직원이 내게 손짓했다. 그녀는 내게 '오늘 밤'에 비행기를 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오늘(밤 12시 전) 떠나는 모든 비행편은 결항되었지만 밤 12시가 넘어서 출발하는 '내일' 비행편은 결항되지 않았고 예정대로 출발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게 항공권 티켓을 건네주며 대한항공 카운터로 가서 오늘 밤 출발하는 뉴욕발 서울행 대한항공 티켓으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원래 내 비행기가 LA 경유 인천행 대한항공이었기 때문에 바꿔 탈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나는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대한항공 카운터로 가서 티켓을 바꾸었다.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의 그녀가 말했던 것과 달리 티켓을 바꾸는 과정에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오버 차지(overcharge)를 지불해야 했지만 어쨌든 '오늘'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여행이 끝났다. 처음 계획했던 것과 다른 길을 걸었던 여행이었다. 어쩌면 시작부터 최초의 계획과는 다른 여행이 되어버렸기에 계획이란 항상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여행이었다.
1년 동안의 여행기간 동안 많은 이들을 만났다. 그동안 "만남 헤어짐과 동의어"와 "남미, 그리고 그 후" 매거진(두 매거진은 "만남 헤어짐과 동의"하나로 통합 예정)의 이야기에 등장했던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다. 그리고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았지만 내게 굉장히 특별한 기억을 만들어 준 사람들도 많다.
우리 모두가 자기만의 삶의 목표가 있듯이 여행자들도 자신들만의 여행 목표와 목적이 있다. 저마다의 동기가 각자의 길로 이끈다.
결국, 나는 이렇게 혼자가 되어 비행기에 오르지만 이것은 여행자가 가진 숙명이라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인연이라면 언젠가 또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기차, 버스를 앞에 두고 그 흔한 메일 주소 한 번 묻지 않고 내가 수도 없이 되뇌었던 말이다.
<남미, 그리고 그 후> 그리고 <만남, 그것은 헤어짐과 동의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