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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C Mar 21. 2016

내 인생을 바꾼 남자 : 이집트 사막

그 기억은 아침 햇살의 강렬함처럼 나를 깨워주었다.

  겪어보지 않는 한,
그 어떤 명언(名言)이라 할지라도
참된 의미를 깨우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때 그와의 만남. 그날의 일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아직까지도 내 머릿속에 또렷이 살아 남아 내 삶에 영향을 주고 있는 그의 말.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두 달여 동안의 여행을 곱씹어 보았다. 두 달간 많은 것을 보고 경험했지만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와 함께한 하루' 였다. 그 기억은 아침 햇살의 강렬함처럼 나를 깨워주었다. 누군가가 수 천 만원, 수 억원의 돈을 제시하면서 그 기억, 그날의 경험을 송두리째 달라고 해도 나는 절대로 팔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소 : 이집트 바하리야


  바하리야 사막, 마지막 행선지였다.

  처음부터 그곳에 갈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정된 일정을 모두 끝내고 카이로에 돌아왔을 때 4일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기에 휴식을 취한 후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득 '바하리야의 흑사막과 백사막'이 눈에 들어왔고,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하라 사막의 동쪽 끝, '시와(Siwa)'에서 출발했던 사하라 사막 투어는 내 생에 최고라 할 만한 즐거움과 감동을 주었고, '바하리야 사막'도 내게 그 같은 감동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겨난 것이다.


  그곳에 가 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다음날 아침 일찍 바하리야행 버스에 올랐고, 그곳에서 1박 2일짜리 사막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할 생각이었다. 바하리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온갖 즐거운 상상을 하며 '사막'에 대한 환상을 키워 나갔다. 모래언덕 사이로 놓인 길을 달리는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이글거리는 대지. 사막의 풍경이 아름다워 보이기까지했다.


※ 사하라 사막의 동쪽 끝. 흔히 시와 사막(Siwa Desert)이라 불리는 곳. The great sand sea.


  카이로에서 5시간. 바하리야에 도착한 버스는 승객들을 밖으로 쏟아냈다. 버스 주변은 마중을 나온 사람들과 호객 행위를 하는 장사꾼들이 뒤엉켜 소란스러웠다. 누군가 나에게 "미스터 스즈키(Suzuki)?"라며 말을 걸어왔다. 그 사람은 "스즈키"라는 사람을 애타게 찾는 듯했다.


  '어디로 가야 할까.'

  혼란스러웠다. 폴폴 날리는 흙먼지. 그 속에 사람들이 뒤엉켜 있었고, 뜨거운 태양은 나에게 현기증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이곳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아무런 계획 없이 온 것이었기에 여행사를 찾아 '사막 투어'에 대해 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 사이를 뚫고 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누렇게 변해버린, 빛바랜 하얀 지프가 경적을 울리며 내 옆에 멈춰 섰다.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소리쳤다.


  "사막 투어 갈 거야?"

  버스에서 내렸을 때 내게 말을 걸어왔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럴 생각이라고 했고, 그는 내게 차에 오르라는 손짓을 했다. 보조석에는 일본인 남자 한 명이 타고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스즈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즈키는 내게 함께 가자고 했다. "혼자 가는 것보다 둘이 가는 게 더 재미있잖아요"라고 말하며 그는 웃어보였다.


  "how much?"

  내가 물었다. 운전대를 잡은 그는 싸게 해 주겠다고, 얼른 차에 오르라고 했다. 220파운드. 그가 처음 제시한 가격보다 조금 더 깎았지만 시와에서 사막 투어를 했을 때 보다는 비싼 가격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지만 이미 차에 올라 출발을 한 상태였기에, 가격을 조절할 여지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식료품점에 들러 음식을 가득 실은 차는 마을을 빠져나갔다. 스즈키는 즐거운 표정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고, 나는 흙먼지에 뒤덮인 채 점점 멀어져가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운전기사는 자신을 '알리'라고 소개했다. 바하리야의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지만, 가끔씩 사막 투어 가이드를 하기도 한다고 했다. 보조석에 앉은 남자, 스즈키. 그는 일본 도쿄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는 한의사인데, 잠시 한의원 문을 닫고 3개월 정도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그는 이번 '바하리야 사막 여행'을 위해 이집트에 왔고 너무나도 기대하던 여행이라고 말했다.


바하리야 흑사막(Black Desert)의 풍경. 검은돌(현무암)이 대지를 뒤덮고 있다.


  '여기가 사막인가'

   사막을 바라보았다. 바위 덩어리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불모의 땅. 조약돌 만한 검은돌(현무암)이 바위와 흙을 덮고 있는 '흑사막(Black Desert)'이었다. 사막 투어에는 사막에서 하룻밤을 자는 것 외에 오프로드(off road) 주행과 음식이 포함되어 있었다. 흑사막을 지나 백사막(White Desert)으로 간 다음 그곳에서 밤을 보내는 일정이었다.

  스즈키는 모든 것이 신기한 듯, 즐거운 표정으로 사막을 바라보았고 탄성을 지르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지프는 포장도로와 비포장 도로를 오갔다. 차는 끊임없이 덜컹거렸지만, 스즈키는 창문에서 떨어지지 않고 밖을 내다보기 바빴다.

  지프는 중간중간 멈춰 섰다. 알리는 돌덩이들을 보라며 작은 돌을 주워 나에게 보여주었다. 바하리야 사막, 더 넓게는 사하라 사막이 옛날에는 바다였다는 사실을 나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난 큰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나는 '시와 사막'을 생각했다. 모래 언덕과 모래 언덕 사이를 신나게 달리며 환호성을 질렀던 그 때를 생각했던 것이다. 단조로운 길, 바위 덩어리들이 즐비한 사막. 내가 생각하던 사막과 다르다는 것 때문에 나는 실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LC,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요?"

  한쪽에서 탄성을 지르며 사진을 찍고 있던 스즈키가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내 표정을 보니 즐겁지 않아 보일 뿐만 아니라 뭔가 걱정거리가 있는 것 같아 보인다는 거였다. 나는 스즈키에게 지난 사막 여행-시와 사막-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시와 사막의 장대한 스케일, 고운 모래 언덕, 스릴 넘치던 오프로드 주행. 그리고 샌드 보딩까지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여긴 재미가 없네요."
  "그런가요? 여기도 좋지 않아요? 시와 사막을 안 가봐서 모르겠지만, 바하리야 사막도 멋진 곳인 것 같은데 안 그런가요?"
  "그냥 좀 별로라는 생각이 들어요."

  시와 사막의 모습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모든 장면들이 시와 사막의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비교 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하리야 사막에 대한 흥미는 떨어져 갔고 무더위로 인한 피로는 두 배, 세 배로 쌓여 갔다. 바하리야로 오던 버스에서의 기대감과 환상은 온데간데 없었다.


  지프는 흑사막을 지나 백사막에 접어들었다. 스즈키는 싱글벙글이었다. 백사막의 버섯 바위들. 사막의 모래 바람 때문에 생겨난,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나는 이미 사막 투어에 흥미를 잃은 뒤였기에 큰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집을 나섰을 때, 알 수 없는 뭔가를 두고 온 느낌. 그 허전함이 채워지지 않았다.  


※ 백사막(White Desert)의 버섯 바위. 석회암 바위가 오랜 세월동안 모래 바람에 마모되어 버섯바위가 되었다.


  셋이 함께 하는 밤은 즐거웠다. 스즈키가 오늘을 위해 많은 것들을 준비해 온 덕분이었다. 알리가 저녁 식사를 만드는 동안 스즈키와 나는 사막 저편으로 사라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음악을 들었다. 스즈키는 사막 여행을 위해 '사막에서 들으면 좋은 음악 컬렉션'을 준비해 왔고, 그 울림은 사막의 공허함 속을 파고들었다. 알리는 저녁 식사로 치킨 바비큐를 준비했고, 밥과 함께 여러 가지 야채, 소스를 곁들여 먹었다. 맥주를 마시며 흥을 돋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둠이 찾아오자 알리는 버려진 생수 통에 물을 담아 '사막 여우'를 유인했다.


  "쉿. 사막 여우가 올 거야."

  숨소리조차 죽어버린 적막. 잠시 후, 사막 여우는 물을 마시러 왔다가 우리의 소리에 화들짝 놀라 달아났다.

  스즈키와 나, 알리는 동양의학(한의학)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였다. 스즈키는 누군가를 치료해야 할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서 침을 비롯한 간단한 의술 도구를 지니고 다녔다. '침'의 효능은 믿을 만하다며, 알리에게 침을 맞아 보라 했지만, 그는 믿을 수 없다 침 맞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이것 봐, 아무렇지도 않잖아."

  사막의 모래 위에 엎드려 침을 맞는 느낌이란. 번듯한 건물의 한의원 평상에 누워 맞는 것과는 달랐다. 달도 뜨지 않았던 밤이었다. 쏟아지는 별빛, 간간이 궤적을 그리며 사라지던 별똥별. 별들을 바라보며 잠을 청했다. 바하리야 사막에서의 하룻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버스정류장의 벤치, 스즈키와 나는 나란히 앉아 카이로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LC, 아직도 사막이 별로였다고 생각해요?"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어요. 그래서 재미가 없었어요."
 "왜 그렇지요?"

  나는 다시 한 번 시와 사막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바하리야 사막 투어와 시와 사막 투어에 대해 설명을 했다. 두 군데의 사막 투어를 비교해가며 내가 만족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애썼다.


  "LC, 나는 아주 만족했어요. 그리고 LC 당신과 함께 해서 너무나도 좋았어요. 이곳은 내가 살면서 처음 와 본 곳이고, 당신과의 만남도 처음이었지요. 그리고 두 번 다신 이런 경험을 할 수 없을 거예요. 그래서 나는 일본에서부터 바하리야 사막 투어를 위해 많이 준비를 해 왔던 거예요. 지금 이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곳과 비교할 필요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그래, 비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비교를 해 봐야 뭐가 더 나아질 수 있으며, 나한테 좋은 게 뭐였을까. 지금 여기에서 내가 즐겁지 않다면, 내 여행은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이 흔하디 흔한 말 한마디. 숱하게 들어왔고, '즐기자! 즐기자!'를 외쳐왔던 나였지만, 정작 내가 '비교'의 굴레에 빠져 지금 이 순간을 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왜 나는 스즈키처럼 활짝 웃지 못했는지, 왜 탄성을 지르지 못했는지.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왜 나는 시와 사막의 환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었는지..



  스즈키는 바하리야 사막 투어를 위해 많은 준비를 해 왔었고, 생에 최고의 시간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나보다 4배나 많은 돈을 사막 투어를 위해 지불했다고 했다. 내가 탔던 지프 한 대, 가이드 알리, 우리가 먹었던 음식. 모든 것이 스즈키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고 사막으로 떠나기 전, 계획에 없던 내가 합류한 것이었다. 하지만 스즈키는 자신이 피해를 봤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함께했기 때문에 더 즐거울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부끄러웠다. 아무리 내가 어렸다고는 하지만, 내 행동에서 비롯된 부끄러움을 참기란 정말 힘들었고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왜 나는 끊임없이 비교를 해야 했나. 기대에 못 미친다고 해서 왜 재미를 느끼지 못했을까. 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을 즐기지 못했나. 지금 여기에서 최고의 즐거움을 찾으려 노력하지 못한 나 자신이 정말 작아 보였다.


  바하리야를 떠난 버스는 지평선 저 끝을 향해 달렸다. 스즈키와 나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즈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일 아침 일찍 그리스로 떠난다는 그는, 어떻게 하면 더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을 것이다.


  그렇게 내 이집트 여행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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