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타의 악명이 과장된 것은 아닐까.
오늘은 당신의 남은 생애 첫날입니다.
- 영화, <아메리칸 뷰티>.
그동안 많은 하이라이트들을 지나왔지만 이곳 또한 손꼽아 기다리던 하이라이트들이 있는 곳이다. 처음 세웠던 계획에서는 아르헨타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시작으로 북쪽으로 올라가며 여행할 생각이었지만 계획은 완전 틀어져버렸다. 시작점은 처음 계획했던 곳과는 반대쪽이라 할 수 있는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Bogota)였다.
내 생애 첫 남미, 보고타.
장소 : 콜롬비아 보고타.
"그라시아스(Gracias, 감사합니다)"
비행기의 기내 방송에서 알아들을 수 있었던 말은 딱 하나였다. 시계를 보니 보고타 도착 예정 시간이 가까워 있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남미에 발을 딛는 순간이 올 것이다.
보고타는 범죄율이 높기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여행 가이드북은 물론이고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들도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말들이 많았다. 굳이 보고타가 아니더라도 여행자는 항상 조심하고 경계해야 하지만 보고타에서는 특히 더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소매치기를 수 차례 당해 봤고 심지어 배낭까지 도둑맞아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첫 행선지에서의 경계심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도착하자 봉변을 당한다면 남미 여행은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타는 90년대 중반 세계에서 가장 범죄가 심한 도시로 여겨졌다. 1993년에는 고의적인 살인 수가 4,352명으로 인구 100,000명당 80명의 비율이었다. 하지만 범죄율 감소는 95년 이후로 지속적으로 이어져왔고, 2007년에는 10만 명 당 살인사건 사망자는 20명, 사건 수는 1401건이었다. 이는 미국의 필라델피아, 워싱턴, 애틀란타 등 미국 도시 지역과 비슷한 수준이며, 오늘날 보고타는 카라카스(베네수엘라), 리우 데 자이네루(브라질) 보다 낮다. - 위키 백과."
보고타 공항은 수도의 공항 치고는 작은 편이었다. 까다로운 절차 없이 입국 수속이 마무리되었고 나는 공항 밖으로 빠져나왔다. 해발고도 2600m.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곳에 위치한 대도시(수도)였다. 12월 중순이면 남미는 계절적으로 한여름이라 할 수 있었고 보고타는 적도 부근에 위치한 곳이라 더울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높은 고도 탓인지 공항을 나섰을 때 받은 느낌은 '더움'이 아닌 '상쾌함'이었다. 피부로 스미는 따스한 햇살과 가벼운 바람이 전해주는 시원한 감촉. 상쾌한 초여름 날씨. 나를 유혹하는 택시 기사들의 눈빛을 뿌리치고 나는 버스 정류장으로 갔고 앞 유리창에 '센트로(Centro)'라고 적힌 로컬 버스(Local Bus, 콜렉티보)에 올랐다. 그 버스가 정확히 어디로 향하는지 몰랐지만 시내로 가는 것임은 분명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일단 시내로 간 다음 숙소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사람들로 가득 찬 버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커다란 배낭을 멘 남자. 누가 봐도 외국인 여행자인 내가 18인승 로컬 버스에 올랐다는 것부터가 현지인들의 관심을 받을만했지만 버스가 출발하고나서부터는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나의 모습 또한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나는 '센트로'라고 적힌 버스에 올랐지만 내가 어디서 내려야 할 지 정확히 몰랐기 때문에 수시로 저 멀리 보이는 '높은 빌딩'을 향해 잘 가고 있는지를 확인해야했고 항상 어디쯤에서 내리면 될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서 내릴까, 좀 더 갈까를 고민한 것이다.
큰 길가에 접어든 버스의 앞쪽 저 멀리에 큰 빌딩이 있었다. 하지만 버스는 빌딩을 향해 나아가지 않고 갑자기 방향을 틀어 빌딩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조급한 마음에 나는 버스에서 내렸다.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지만 큰 빌딩까지 가면 뭔가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곳에서부터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목적지로 향하면 될 터였다. 라 칸델라리아(LA CANDELARIA). 그곳에 위치한 호스텔이 나의 최종 목적지였다.
나는 높이 솟은 빌딩을 바라보며 걸었다. 건널목을 지나 빌딩을 향하고 있을 때였다. 횡단보도 앞에서 나를 유심히 보고 있던, 같이 길을 건넌 한 젊은 여자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스페인어와 영어를 섞어 말을 하는 그녀. 그녀는 내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고 나는 빌딩을 가리켰다. 그녀는 웃었다. 자신도 그쪽으로 간다고 했다. 그녀의 친절한 미소는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젊고 예쁜 여자의 미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소매치기의 표적이 된 건가하는 불안감이 솟구쳤다. 이집트 여행을 할 때 2인조 여자 소매치기 일당에게 당했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르면서 내 몸과 마음은 자연스럽게 경계 모드로 돌입했다.
나는 저 높은 빌딩을 향해 가고 있노라고 거기서부터 '라 칸델라리아'를 찾아갈 생각이라고 말하면서도 나에 대한 정보를 너무 많이 흘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에 시달려야했다. 그녀의 매혹적인 미소는 나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릴만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나는 정신을 다잡으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한 손에 큰 책을 든 그녀는 분명 대학생처럼 보였지만 팔짱을 끼듯 옆에 착 달라붙어 나에게 말을 건네는 그녀의 행동은 나의 경계심을 더욱 부풀어 오르게 했다. 내 몸의 모든 신경은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의식하고 있었다.
'대학생을 가장한 소매치기일지도 몰라. 웃음은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술책일지도..'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 팔짱을 끼듯 다가와서 웃음을 짓는 그녀. 그러한 그녀의 행동은 의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녀는 분명 지금까지 내가 길에서 만난 그 누구보다 호의적이고 친절해 보였다. 그녀는 내게 말을 하면서도 내가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아주 천천히 또박또막 말했고 자주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친절은 오히려 나의 마음속에서 그녀가 '소매치기'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더욱 키우고 있었고 그녀의 호의는 뒷전이었다. 이런 여자가 소매치기일지도 모른다니.
어느새 우리는 높은 빌딩(그 건물의 이름은 'Bancolombia Centro Internacional'였다)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차들이 몰려오는 쪽을 가리키며 그쪽이 라 칸델라리아로 가는 방향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버스를 타고 반대쪽으로 가야한다고 했다. 기다리던 버스가 왔고 그녀는 버스에 올랐다.
"잘가요. 안녕!"
그녀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웃었다.
※ 소매치기를 주의하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한 표지판(??왼쪽)과 횡단보도의 보행자 배려를 알리는 안내판(오른쪽)
그녀는 소매치기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버스를 타고 떠난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을 한 나를 자책했다. 이렇게까지 의심을 할 필요가 있었던가. 내가 가졌던 의심의 마음으로 인해 그녀의 호의를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못했던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어쩌면 그녀도 '나를 이상한 외국인'으로 생각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 보고타 사람들 모두를 의심할 필요는 없어. 항상 경계하고 의심하는 건 나 한테도 그들한테도 좋지 못한 일이다. 보고타는 어쩌면 사람들이 말하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친절한 곳일 수도 있어. 괜한 색안경을 쓸 필요는 없지. 그동안 사람들이 이야기해 왔던 보고타를 잊자.'
나는 그녀가 알려준 방향으로 걸었다. 사람들에게 "라 칸델라리아, 라 칸델라리아"라고 물으며 'Calle 12'를 찾아갔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리를 걷던 사람들 모두 예상치 못한 일이었는지 사람들은 비를 피해 근처 호텔의 출입구 쪽으로 몰려갔고 나도 그들을 따라 그곳으로 향했다. 호텔 출입구는 소나기를 피하기 위한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는 사람들 틈 사이에 껴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내 뒤쪽, 배낭이 있는 쪽에서 사람들이 부대끼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라도 누가 내 가방을 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설마, 내 가방을 열고 뭘 가져갈까. 괜히 의심할 필요는 없지'
비가 빨리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물줄기를 세차게 뿌려대던 시커먼 구름이 걷히고 파란 하늘이 보였다. 빗방울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자 사람들은 다시 거리로 흩어졌다. 내가 거리로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누군가가 뒤에서 내 어깨를 쳤고 그는 가방을 가리켰다.
'응? 뭐지?'
나는 배낭을 내려 그가 가리킨 쪽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배낭 뒤쪽 지퍼가 열려있었다. 황급히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 들었던 봉퉁 몇 개 -옷을 넣어 두었던 봉투-가 사라진 것이었다. 다행히 그곳엔 중요한 물건이 없었다. 비가 내릴 때의 부대낌. 이상한 느낌이 들어 뒤돌아 보았을 때 나와 눈이 마주쳤던 두 명의 남자. 내게 눈웃음 짓던 그들이 생각났다. 그들이었을까. 그들은 비가 그친 뒤 그 자리를 뜨면서 내게 말했었다.
"소매치기 조심해. 콜롬비아에는 소매치기가 많다."
소나기가 내리던 순간, 비를 피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틈에서 내 가방을 열고 옷이 담긴 봉투 몇 개를 가지고 간 누군가가 있었다.
'의심하지 말자'라는 마음을 먹고 방심했던 순간 소매치기를 당한 것이었다. 다행히 중요한 물건들을 도둑맞은 건 아니었지만 소매치기를 맞았다는 생각은 나를 불쾌하게 했다. 보고타에 도착하자마자 호의와 악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니.
※ 보고타 시내의 풍경. 콜렉티보(시내버스)들이 끝없이 줄지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남미 도착 첫날, 약간의 불쾌함을 맛보았지만 보고타에서 보낸 3일은 밤낮 가릴 것 없이 즐거웠다. 호스텔의 도미토리에서 만난 네덜란드 출신의 로빈은 술을 좋아했다. 일주일째 보고타에 머물고 있다는 그는 나를 숙소 근처의 괜찮은 술집에 데려다주었고 함께 술을 마셨으며 춤을 추러 다녔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보고타의 악명이 '과장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로빈도 나도 밤은 위험하다는 생각에 어둠이 내린 보고타의 거리를 혼자 돌아다니지는 않았지만 낮의 보고타는 혼잡한 도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보고타의 구시가와 신시가를 돌아다니며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준비가 한창인 보고타를 보았다. 구시가에는 고요함 속에서 새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여유로움이 있었지만 신시가에는 수 많은 인파와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뒤섞여 혼잡함이 극에 달해 있었다. 너무나도 극명하게 대조되는 신시가와 구시가의 모습.
골목을 지나다니며 보고타 사람들의 삶을 구경할 때면 사람들은 나에게 카메라를 가방에 넣으라고 말했다. 경찰들은 혼자 길을 걷는 나를 볼 때면 내게 다가와 카메라를 가방에 집어넣으라는 주의를 주었고 상점의 주인들, 골목의 아주머니들도 카메라를 가방에 넣는 시늉을 하며 조심해야 한다고 타일렀다. 나는 그럴 때 마다 카메라를 가방에 넣었고 골목의 모퉁이를 지나면 다시 카메라를 꺼냈다. 그들이 나한테 괜히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보고타 성당(Catedral Primada de Colombia)와 볼리바르 광장(Plaza de Bolivar).
※ 사람들. 어딜 가든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착하다.
※ 로빈과 함께 갔던 클럽. 음악과 춤, 그리고 술만이 있는 곳. 흡연 금지 클럽.
보고타는 친절했다. 어쩌면 '범죄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악명 때문인지도 모른다. 보고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시가 그토록 악명 높은 도시로 불리기 싫었을 것이다. 그렇게 불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관광객들에게 주의를 주는 것이고 친절을 베풀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보고타에 있는 동안 도시 곳곳에서 친절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리고 클럽에서 바(Bar)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정열의 남미를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던 보고타. 다음 행선지는 보고타 남서쪽의 '칼리(Cali)'였고 그곳에서 다시 미니버스를 타고 국경도시 '이피알레스(Ipiales)'로 간 다음 에콰도르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보고타에서 칼리까지 버스로 12시간. 그리고 칼리에서 이피알레스까지 버스로 10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22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여정. 하지만 그것은 본격적인 남미 여행의 서막에 불과했다.
※ 골목 풍경과 보고타 터미널.(보고타 무료 극장(Teatro libre de Bogota/왼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