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C Mar 23. 2016

하늘과 맞닿은 십자가 도시 : 에콰도르 키토

키토, 참으로 생소한 이름

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 

- 마르셀 프루스트

  보고타에서 야간 버스를 타고 칼리까지 12시간. 칼리의 버스 터미널에서 국경 도시인 '이피알레스(Ipiales)까지 미니버스에 몸을 싣고 10시간을 더 갔다. 시골의 오래된 마을버스만큼 헤지고 불편한 의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버스에 올라 남쪽으로 향했지만 결코 지루한 시간은 아니었다. 구름이 걸려있는 산. 안데스 산맥의 끝자락에서 만나는 풍경과 이방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친절함은 여행자의 눈을 즐겁게 하고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피알레스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나는 싸구려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콜롬비아와 에콰도르의 국경 검문소를 차례로 드나들면서 출입국 수속을 마쳤다. 국경을 넘기 위한 여정에 꼬박 이틀이 걸린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번 여정의 목적지인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Quito)까지 가려면 아직 한참을 더 가야 한다. 국경 검문소가 위치한 루미 차카(Rumichana)에서 콜렉티보(승합차)를 타고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툴칸(Tulcan)으로 가야 했고 그곳에 가야만 '키토'로 떠나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툴칸에서 키토까지는 5시간이나 더 가야 했다.

콜롬비아 - 에콰도르 국경을 넘으며.



   장소 : 에콰도르 키토.


  키토(Quito). 참으로 생소한 이름이다. 대륙을 넘나드는 여행을 계획할 때 리스트에 없던 에콰도르였기에 키토라는 이름은 낯설었다. 하지만 콜롬비아에서부터 육로로 페루의 마추픽추로 가려면 꼭 지나야 하는 도시였고 무엇보다도 키토는 갈라파고스 제도로 떠나려는 많은 사람들이 머무는 도시이기도 했다.


  콜롬비아의 보고타에서부터 키토까지 약 30시간 동안의 이동. 오랜만에 장시간 차를 타고 이동해서 그런지 나는 많이 지쳐있었다. 키토에서는 좀 여유를 가지고 쉬면서 볼리비아 비자 발급을 위한 황열병(Yellow fever) 예방 주사를 맞을 생각이었다. 애초에 나에게 있어 키토는 휴식처로서의 키토였다.


  나는 구시가(Old City)에 있는 호스텔에 묵었다. 구시가에는 저렴한 호스텔들이 많이 있었고 길거리에는 여행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걸어가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구시가의 건물들은 스페인 식민지 시절의 느낌이 많이 배어있어서 그런지 콜롬비아에서 구시가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뒤섞여 흡사 카오스 상태 같았던 보고타와 달리 키토는 비교적 조용했고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유럽의 오래된 거리를 연상케 하는 구시가는 장시간의 여행에 지친 여행자들이 푹- 쉬고 싶게 만드는 아늑함을 가지고 있었다. 해질녘 노랑, 초록의 벽에 노을 빛이 스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찌개와 공기밥이 생각나는 그런 곳이었다. 이곳에서 찌개와 공기밥을 어찌 찾으랴. 해질녘이면 나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부인이 미소지으며 밥을 내어주는 테이블이 하나뿐인 식당에서 허기를 채우고 숙소로 돌아갔다. 


  "키토의 구시가는 내가 가본 남미의 여러 나라 구시가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야."

    한 여행자가 내게 한 말이다. 과연 그 정도로 칭찬을 받을 만한 곳인가? 기껏 해봐야 콜롬비아의 보고타밖에 못 가본 나로서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의 진위 여부를 떠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첫인상만큼은 보고타보다 키토가 훨씬 좋다는 것이다.


※ 테이블이 하나 밖에 없던 구시가의 허름한 식당. 나는 이곳에서 종종 식사를 했다. 메뉴는 단 하나, 약간의 야채를 곁들인 삶은 옥수수와 치킨 조각이 전부였다. 

※ 키토의 구시가(위쪽 사진)와 성모 마리아상(왼쪽 아래 사진의 왼쪽 중간 부분)과 그곳에서 바라본 키토 구시가. 키토 구시가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모습이 잘 보존되고 있는 곳으로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기도 하다.

 

  나는 키토의 구시가를 걷고 또 걸었다. 산책을 하듯 서두르지 않고 걸었다. 가끔은 트롤리(위쪽에 전기선을 연결해 이동하는 버스)를 타고 신시가에 나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구시가의 광장에서 보냈다. 구시가에서는 십자가를 흔히 볼 수 있었다. 도시 곳곳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고 골목에서 성당을 발견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언덕 위에서 키토의 구시가를 굽어보는 거대한 성모 마리아 상(Virgen de El Panecilo)은 키토가 성모 마리아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전해주었다. 


  투명한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사람들은 대통령궁 앞의 광장 'Plaza Grade('독립광장'으로 불린다)'와 그 주변에 모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그들 틈에 섞여 그곳에서 책을 읽기도 했으며 광장 주변 시장과 상점들을 둘러보았다. 시간은 많았다. 나는 엽서 몇 장을 샀다. 에콰도르. 이국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으로부터 날아온 엽서를 받게 될 그 친구를 생각하며 엽서를 섰다. 


※  성 아구스틴 대성당(Iglesia de San Agustin) 옆의 십자가(왼쪽)와 산토 도밍고 성당(Iglesia de Santo Domingo) 앞의 광장과 십자가.

※ 독립 광장의 탑(왼쪽)과 바실리카 대성당(Basilica del Voto Nacional)의 모습.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볼 만 하다.

※ 키토의 대중 교통 '트롤리'(왼쪽). 거리를 걷다가 크리스마스 기념 거리 행렬을 볼 수 있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거리 행렬의 앞쪽의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경찰이 나를 '국립 보건소'에 데려다 주었다.


  황열병은 말라이아와 마찬가지로 모기에 의해 감염되는 병으로 볼리비아 비자 신청을 할 때 '황열병 예방 접종 확인서'를 제출해야만 비자 발급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페루의 쿠스코(Cusco)에서 볼리비아 비자를 발급받을 예정이었고 이를 위해 키토에서 황열병 예방 접종을 한 뒤, 페루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큰 병원이라면 황열병 주사를 놓아줄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지도에 나와있는 '큰 병원(Hospital Enrique Garcés)'을 찾아갔다. 병원 접수대에서 "피에브라 아마리아, 피에브라 아마리아(Piebra amaria/Yellow fever)"라고 하니 데스크에서는 손을 내저으며 입구에 있는 안내소로 가 보라고 했다. 나는 그곳에서 또다시 주사 맞는 시늉을 하며 "피에브라 아마리아"라고 했고 안내소의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여기선 안돼. 보건소로 가봐.(No, Centro de Salud)"


 나는 그녀가 "안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고 종이를 꺼내 적어 달라고 했다. 그녀는 뭔가를 적었다. 

'Centro de salud'

  

  여긴 또 어디란 말인가. 나는 그녀에게 "돈데 돈데(Donde/where)"라고 말고 그녀는 종이에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라고 적어주었다. 구시가였다.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구시가로 가라니. 큰 병원을 찾아 먼 곳까지 온 것이 헛걸음이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 왔다. 여기서부터 어떻게 가야 하지?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할지 몰랐던 나는 경찰에게 쪽지를 내밀며 말했다. "피에브라 아마리아". 경찰은 쪽지에 적힌 내용을 유심히 보더니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경찰은 턱으로 자신의 뒷자리를 가리켰다.

 "타!"


  오토바이는 광장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을 비집고 지나갔다. 부아아앙- 오토바이는 모퉁이를 몇 개 돌았고, 오래지 않아 하얀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경찰은 내게 들어가라고 했다. 문 옆에는 'CENTRO HISTORICO, Centro de salud No 1 '이라고 적혀 있다. 보건소였다. 건물 안은 어둡고 습했다. 페인트가 벗겨진 낡아빠진 의자에는 바짝말라 광대가 불거져 나온 사람 몇 명이 앉아 있었다. 나는 접수창구로 가서 "옐로우 피버"라고 말했다. 간호사는 나를 2층으로 데려갔고 내 팔에 주삿바늘을 꽂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10달러를 지불한 나는 노란색 종이 한 장을 받았다. 잃어버리지 않고 잘 간직해야 할 물건. 황열병 예방 접종 확인증이었다.


※ 국립 보건소의 입구(왼쪽). 밖에서 봐도 안은 암울한 분위기 일거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 황열병 예방 접종 확인서. 이것이 있어야 볼리비아 비자를 발급 받을 수 있다.


 나는 키토에서 3일을 보냈다. 그 사이 버스로 3시간 거리에 있는 키토 근교의 '오타발로(Otavalo)'에 잠시 다녀왔다. 오토발로에서 시장(Market)이 열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다녀온 것이다. 에콰도르의 전통 시장의 모습을 보고 싶으면 한 번 다녀와도 좋을 것이라는 호스텔 주인의 말을 듣고 그곳에 다녀온 것이다.  키토에서의 휴식과 황열병 예방접종. 이 정도만 만족할 만한 성과다. 호스텔 주인은 근교에 적도 박물관이 있다며 그곳에도 한 번 가볼 것을 권했지만 그곳까지는 가지 않았다. 또 한 번 버스를 타고 그곳까지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에콰도르는 적도가 지나는 곳이었지만 적도가 지나는 곳은 에콰도르 말고도 수 없이 많다. 페루의 리마까지 먼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나는 좀 더 쉬는 걸 택했다. 


  또 한 번의 긴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 오타발로의 시장 풍경.



매거진의 이전글 호의와 악의 사이 : 콜롬비아 보고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